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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들려준 이야기
  • 입상자명 : 장미숙
  • 입상회차 : 21회
  • 소속 :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제 21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일반부/시수필부문 일반주제 우수상

장미숙님의 나무가 들려준 이야기

<나무가 들려준 이야기>
해가 바뀌고 다시 푸른 계절이다. 산은 하루가 다르게 울창해지고 나무의
모습도 나날이 변하는 중이다.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이제 초록의
성전을 이루었다. 알록달록한 색을 버린 나무들이 참선에 든 듯 고요한 숲길
을 걷는다. 잠시 걸었는데도 답답하던 숨이 트인다. 흙에서 올라오는 정기가
굳은 발바닥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숲은 바탕색부터 다르다. 도시를 감싼 색
깔이 부연 안개처럼 흐릿하다면 숲속의 색은 소나기 스치고 지나간 듯 말갛다.
오르막길에서 잠시 숨을 몰아쉬다 위쪽을 올려다보니 상수리나무가 넓은
팔로 하늘을 감싸고 있다. 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빛이 청명하다. 무성한
초록 이파리와 눈을 맞춘다. 이제는 낯이 익어 반기는 것인가. 긴 가지를 흔
들며 푸른 기운을 뿜어낸다. 어서 오라는 나무의 배려로 읽힌다. 수령이 얼
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키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굵고 널따란 나무 밑동이 흙을 꽉 붙들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치고 있다. 울
퉁불퉁한 외수피는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그 사이로 수많은 길이 생겼다. 시
간이 만들어 놓은 무늬다. 군데군데 파인 옹이에는 나무의 이야기가 고여 있
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송파 둘레길을 걷는다. 마을 공원과 이어진 둘레길은 가운데
숲이 있어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공원의 밋밋함도, 산의 험한 지형도 아닌
적당한 높이가 숨을 고르게 한다. 원래 야산이었던 곳을 둘레길로 만든 덕분
에 산의 형태는 그대로다. 멀리 있는 산을 찾지 않아도 자연의 정기와 숲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좋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과 걱정, 불안을 안고 산지 여러 해가 지났
다. 남편이 갑자기 병마로 쓰러지면서 가정이 무너졌다. 나이 오십 후반에
나는 가장이 되었고 삶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구급차에 실려
간 남편은 해가 여러 번 바뀌었건만 아직도 병원에 입원 중이다. 마비가 온
탓에 누워만 있는 그를 보며 눈앞이 캄캄했다. 절망의 깊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아득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생계에 매달리며 남편의 뒷바라지에 점점 지쳐갔다. 처음에는 안타까움으
로 도닥여 주던 이들도 등을 돌렸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내 짐의 무게는 갈
수록 무거워졌다.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암담했다. 뿌리가 뽑혀 흔들리
는 삶을 바로 세우려 안간힘을 쓸수록 바람은 거세게 몰아쳤다. 육체적 노동
에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적 고통은 불면을 가져왔다. 아무리 둘러보아
도 기댈 곳이 없었다. 여유가 있어야 할 나이에 오히려 생의 출발선에 다시
선 것처럼 두려웠다. 응어리를 풀 곳이 절실히 필요했다. 산속으로 깊이 들
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찾아들 때면 먼데 산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다. 산골에서 태어나 자란 덕에 산은 안방처럼 편
한 곳이었다. 밭조차 산에 있어 노상 오르내렸다. 땔감을 하러 가면 온종일
산이 놀이터고 학교였다. 산속에 파묻힌 마을풍경도 산을 모태로 느끼게 했
다. 바라만 봐도 눈과 마음이 시원해졌다. 고향을 떠난 뒤에는 한동안 산의
냄새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십 대에 다시 산을 만났다. 회사 산악회에
서 매주 전국의 산을 찾아다녔다. 정신에 푸른 물이 가득 찬 시절이었다.
하지만 다시 산을 잃어버린 건 삶에 치이면서부터였다. 만만치 않은 생활
은 여유와 거리가 멀었다. 갈증을 느꼈지만, 산은 늘 마음속에만 있었다. 도
시의 공원들을 다니며 나무를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
다. 어떤 나무든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건 숲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다못해 직장 앞에 있는 가로수 은행나무와 연을 맺
기도 했다. 일하다 눈을 들면 은행나무는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 강인함과
헌신, 속정에 매료되었다. 은행나무에 말을 걸며 사계절을 보냈다.
둘레 길이 생기면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
다.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숲이 있어 살 것 같았다. 드디어 숨이 트이기 시작했다.
작은 산이지만 다채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다. 봄이면 아카시아꽃이 풋풋한
향기로 마음의 순수를 깨웠다, 초여름이면 밤꽃의 독특한 향이 발길을 멈추
게 했다. 참나무종인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가장 많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산사나무, 배롱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도 숲의 도화
지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 메타세쿼이아는 반듯한 숲의 정령처럼 돋보였다.
나무뿐 아니라 원추리, 벌개미취, 꽃범의꼬리, 맥문동 등 감성을 자극하는 꽃
도 지천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나무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건 나무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관찰하면서부터였다. 나무는 하나같이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처
럼 제각각 특징이 있었다.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두께가 다르고, 모양이 다
르고 크기도 달랐다. 반듯하게 하늘로 치솟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가지를 벌
려 옆으로 뻗은 나무도 있었다. 서로 꼬인 나무, 의지하듯 기댄 나무, 아예
누워버린 나무 등 다른 모습으로 나무는 각자의 몫을 해냈다.
가장 마음을 끄는 건 나무에 있는 옹이였다. 옹이를 들여다보며 나무의 삶
을 헤아려 보았다. 옹이가 없는 나무는 없었다. 사람도 삶의 굴곡을 건너듯
나무도 쉽지 않은 세월을 견뎌왔음이 분명했다. 옹이가 깊이 파여 구멍이 난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건 말하고
싶어 하는 나무의 입처럼 보여서였다. 사람도 자신의 삶을 주저리주저리 누
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듯 나무도 그럴 것 같았다. 나무의 옹이에 귀를 대면
깊은 메아리가 울리는 것도 같았다. 어떤 때는 손바닥을 마주해 따뜻한 기운
을 나누기도 했다.
폭풍우와 비바람에 꺾이고, 사람의 손에 의해 베인 상처들은 옹이로 남아
나무의 시드러운 날들을 말해주었다. 어느 날은 소나무의 옹이에서 흘러나온
송진 때문에 가슴이 선뜩했다. 얼마나 슬픔이 깊었으면, 그리고 아팠으면 송
진이 보굿에 천(川)을 이루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무들
도 살고 있었다. 견디고 있었다. 치열하지만 그것을 굳이 내색하지 않으며
의젓하게 숲을 꾸려가고 있었다. 어느 나무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는 걸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상수리나무 옆 작은 바위에 앉아 나무와 눈을 맞추며 오늘도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지금은 초록이 절정을 이루는 여름이다. 여름은 나무를 가장 성
숙하게 만든다. 봄에 어리광을 피우던 나무가 철이 들어 부쩍 크는 시기이기
도 하다. 그런 나무가 나를 다독이는 듯하다. 그늘을 드리워 감싸주는 나무
의 넓은 품을 느낀다. 내 안에 박힌 옹이에 새살이 돋고 이야기가 차오를 즈
음이면 나도 한 그루 나무처럼 우뚝 설 수 있을까. 상처의 진물이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날까. 주위를 돌아보니 그렇다는 듯 나무들이 일제히 가지를 흔들
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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