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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달곰새금한 사계절 감나무 레시피
  • 입상자명 : 이영혜
  • 입상회차 : 19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바람의 지휘에 맞추어 황금 물결이 일렁거린다. 넓은 논 사이 구불구불한 다님길 끝에 키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아래 대여섯 되어 보이는 파란 옷의 아이가 서 있다. 그루잠에서 깬 바람이 다시 일자 노란 벼 이삭들이 밀밭으로 변하며 춤을 춘다.
멀리서 누이인 듯한 아이가 동생이 손지하는 감을 따러 쪼르르 나무에 오른다. 대봉시를 따 아이에게 건네려는 순간 아이는 사라진다. 어느새 아이는 베르테르의 파란색 연미복과 노란색 조끼를 입고 강 건너에서 웃는다.
누이의 머리 위에 까마귀 떼들이 날고 있다.
암막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돋을 볕의 아침 인사를 받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지난 밤 꿈을 새겨보았다. 감나무. 고향집 마당에 심어져있던 먹감나무. 갑자스레 지천명 중반을 거닐던 동생이 깊은 잠이 든 고향집을 한ㄹ번 가보아야겠다 생각했다. 나서기 전에 선 채로 꿈 풀이를 찾아보니 '감을 따는 꿈은 운수대통하고 아주 기쁜일이 생긴다.'라고 나왔다. 나쁜 꿈이 아니라니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을 찾았다.
녹색 철 대문을 열자, 마당에서 놀던 새 몇 마리가 놀라서 포롱걸리며 날아갔다. 돌담 옆 감나무는 사그랑이가 되어 고욤나무 등걸만 남아 외로이 집을 지키고 서 있었다. 고욤나무 같았던 어머니. 고욤나무 접붙이듯 시집온 어머니는 자신의 몸치장 대신 선산의 밤나무와 감나무들을 다듬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여린 감잎들로 차를 덖었다. 감잎을 찌고 덖는 과정은 제례를 치르는 것처럼 정갈해 보였다. 어머니가 삽짝을 바라보며 그윽한 모습으로 드시던 감잎차를 우리가 마셔보곤 특유의 텁지근한 맛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월이면 당신의 삶처럼 떫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주셨는데 동생의 것이 더 예쁘다고 삐졌던 기억이 있다. 터럭 한 올만 한 일에도 두 살 터울의 남동생에게은근히 질투심을 느끼곤 했다.
초복이 지나 여름철 땡볕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떨어져 버린 풋감을 주워 돌담위에 올려두면 떫은맛이 없어져 그 당시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어느 날 내가 장독 위에 올려둔 풋감을 어머니가 동생에게 주어버렸다. 매일 만지작거리며 말랑말랑 익기만을 기다렸는데 그 아까운 것을 동생이 나름 먹어버리다니....
그 이후 나는 동살이 퍼지기도 전에 식구들 몰래 일어나 풋감을 주웠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사금파리 숨기듯 두었다가 익으면 먹곤 했다. 어머니는 땡감을 더운물에 하루 정도 담그거나 술통에 넣어두기, 소금물에 담그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떫은맛을 없애는 기술을 보여주셨다. 그중에서 땡감을 항아리에 넣어 끓여 식힌 소금물을 부어 두었다가 먹기 전에 물에 담가 짠맛을 없애고 먹는 감이 나는 가장 맛이 있었다.
마을 깊숙한 곳에 적바림해두었던 감나무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니 그 여름의 짙푸른 감나무 산을 만나고 싶었다. 선바람에 나서서 강아지풀의 사열을 받는 바람의걸음에 맞추어 산으로 향했다. 숲정이에 들어서자 손은 발과 같이 걸으며 나의 오감은 매우 분주해졌다. 개망초꽃의 은은한 향을 맡으며 나의 자수에 자주 등장하는 보랏빛 엉겅퀴와 물기 많은 곳에 터를 잡고 있는 물봉선, 고마리, 미나리아재비에게 "너희가 이 산을 지키고 있었구나."하고 악수를 청했다. 근처 여러 종류의 사초들도 살랑살랑 기다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섶을 따라 줄딸기가 넌출지게 늘어서 있었고 덩굴에 오종종 매달린 주홍빛 딸기는 사람의 손을 기다리다 지쳐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넝쿨에 숨어 있는 가시를 피해 잘 익은 딸기를 자밤자밤 다서 입안에 한 움큼 털어 넣었다. 달보드레한 맛이 혈관을 따라 전해져 갱년기의 노화를 깡그리 지원주는 듯했다. 고사리와 흡사한 고비에 칭칭 감긴 딸기 덩굴을 떼어 주려다 가시에 찔리긴 했으나 자신을 지키려 앙칼진 모습을 보인 것 같아 귀엽게 여겨져 "미안해."하며 본 가지 가까이 살짝 놓아주었다. 산모롱이에 들어서니 적막한 숲의 잠을 깨우는 뻐꾸기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렸다. 뻐꾸기가 우는 슬픈 사연이 있지만 내게는 옛동무를 맞이하는 소리로 들려 반가웠다.
이어지는 솔수펑이를 지나 펼쳐지는 감나무밭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죽은 뱀을 보고도 경기 들린 듯 울던 남동생도 없다. 아무도 없고 갈맷빛으로 짙어지는 감나무 잎들만 늙은 내가 낯선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홍시를 하나둘 따먹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열린 감은 집 마당의 감처럼 가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겨울, 어린 나는 매서운 바람에도 높은 곳에서 간당간당 매달려 새들의 식사가 되는 모양을 손갓을 하고 바라본곤 했다. 손갓을 했던 평평한 이마에 이제 주름이 자글자글 새겨졌고 그 겨울, 감나무에 내려여앉앗던 하얀 눈이 계절도 없이 내 머리에 내리고 있다. 한동안 우두망찰 서서 감나무의 행간을 더듬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버지와 남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나무 어느 가지엔가 아버지의 숨결이 흐르고 있고 남동생의 귀여운 볼우물이 푸릇한 감꼭지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요즘도 감나무는 시골이 아닌 도시 주택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지만 나에 겐 삼천 년에 한번 열린다는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보다 더 값지다. 감나무의 모세혈관 속에는 우리 가족의 일기들로 빼곡하므로... 그래서 곧 어날 내 손자에게 나만의 감나무 레시피를 선물하고 싶다. 사철 달라지는 감나무 재료에 고소한 햇살을 뿌리고 절기마다 비 몇 방울 쪼르르 두른 다음 조물조물 사람의 정성으로 버무린다면 그 맛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손자의 영혼이 힘겨운 일로 각다분할 때 그 맛을 보게 된다면 우리가 그랬듯 아득히 먼 시간으로부터 북소리를 듣게 되고, 손자의 여린 대궁이 더욱 튼튼해지며 시들해진 영혼은 맑게 깨어날 것이다. 파우스트가 비극에 절망하고 고뇌하는 마음을 알프스 자연의 정령들에게 치유 받았던 것처럼 .... 손자에게 줄 감나무 레시피를 적바림하면서 괴테의 시를 읊조리며 숲을 다시 걸어 나왔다. 아픈 내 영혼이 이렇게 가뜬해졌으니 오늘 꿈 풀이처럼 오늘은 운수대통하고 기쁜 날이다.

숲으로 갔네/그렇게 나 혼자서/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그게 내 뜻이었넨 - 괴테의 시 '발견'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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