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가치를 꽃으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은 꽃이 시들고 나면 더 볼 것이 없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하지만 꽃이 피었다가 점차 시들어가는 과정 하나하나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식물은 섬세하게 계획된 목표를 조용히 달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진행되는 식물의 생식 전략은 끝없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은 말도 없고 너무도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인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물마다 꽃이 피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꽃이 지는 과정과 꽃이 진 후의 모습도 다릅니다. 꽃받침의 꽃이 다 피기도 전에 빨리 떨구어 버리는 양귀비과(Papaveraceae)가 있는가 하면, 가지과(Solanaceae)는 꽃이 진 후에도 꽃받침이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마편초과(Verbenaceae)의 누리장나무는 다재다능한 꽃받침이 있어서 개화 전부터 꽃이 진 후까지 꽃과 열매를 보호하면서 씨앗 산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꽃잎이 시든 후에 더 붉게 변하는 꽃받침은 또 다른 모양의 꽃이 핀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꽃향기에 취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식물이 누리장나무인데, 하지(夏至) 무렵에 꽃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7월이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꽃의 수술과 암술은 위와 아래로 움직이며 서로 위치를 바꾸어서 자가수분을 방지하고자 합니다. 처음 꽃이 필 때는 위쪽의 수술이 먼저 성숙하면서 꽃가루를 내보내는데, 이때의 암술이 땅을 향해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후 수술이 자신의 소임을 마치면 수술대가 꼬이면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암술이 서서히 위쪽으로 부상하면서 위치를 교환합니다. 그렇게 암술과 수술의 시간이 지나고 꽃이 시들면 이제는 꽃받침이 활약을 시작합니다. 입구를 막아서 어린 열매를 보호하고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열매가 청보라색으로 다 익으면 꽃받침은 마침내 벌어지면서 붉은색의 열매받침대가 되어줍니다. 붉은색으로 폋쳐진 받침대는 열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서 씨앗 산포자를 유혹할 것입니다.
꽃은 아래를 향하는데 열매는 위를 향하는 소경불알
소경불알의 꽃은 아래쪽을 향하며 피기 시작하지만, 열매는 위를 향하면서 익어갑니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방향이 바뀌게 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꽃만 볼 때와는 다른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초롱꽃과(Campanulaceae)의 덩굴성 여러해살이풀인 소경불알은 더덕과 유사하지만, 뿌리가 알처럼 둥근 형태입니다. 꽃은 다른 초롱꽃과 식구들처럼 수술이 먼저 성숙하여 꽃가루를 내보내는 웅예선숙으로 자가수분을 방지합니다. 땅을 보면서 처음 꽃이 피기 시작할 때는 수술이 발달해서 꽃가루를 생산하고, 점차 옆으로 향할 때는 암술의 주두가 3갈래로 갈라지면서 꽃가루를 받아들입니다.
이윽고 꽃가루받이가 성공하고 꽃이 시들 무렵엔 꽃은 하늘을 향하면서 열매 단계로 진입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열매가 벌어질 때 모든 씨앗이 바로 어미식물 옆에 쏟아져버리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진화적 적응일 것입니다. 소경불알의 살뜰하고 섬세한 전략은 열매가 다 익을 때까지 붙어있는 꽃받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꽃받침이지만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하는 씨앗을 위한 프로펠러로써 기능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 속의 씨앗을 바람에 날려서 멀리 보내는 것은 저비용이지만 고효율의 전략이므로 많은 식물이 즐겨 이용하는 산포 수단인데, 개울가에 자라는 개버무리도 그러한 식물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피기 시작할 때는 아래를 향하지만 조금씩 위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개버무리꽃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는 다른 한편으론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개버무리는 이렇게 낮에는 햇볕이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과 가을의 중간쯤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덩굴식물입니다. 꽃은 노랗게 피기 시작해서 흰색의 깃털 달린 열매로 마무리되는데, 이런 열매 형태는 으아리속 식물들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꽃이 진 후에 깃털이 풍성한 열매로 부풀어서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쓰임새 많은 정원 식물이기도 합니다,
개버무리의 꽃봉오리는 아래를 향해서 개화하는데, 꽃잎처럼 보이는 4장의 꽃받침이 점차 시들기 시작할 때 위쪽을 향해 움직입니다. 꽃이 시들면서 꽃받침과 수술은 함께 사라지지만 암술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씨앗 산포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모습을 변화시키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바람에 반응하는 날개로서 기능하기 위해 암술대가 길어지면서 잔털이 무수히 돋아나는 동안 씨앗은 차곡차곡 양분을 저장하고 성숙해갑니다.
이제 개버무리의 열매는 모든 준비를 마쳤고, 언제 불어올지 모를 바람을 조금이라도 잘 받기 위해 하늘을 향해서 대기하면서 기다립니다. 어디로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운명의 손길이 햇빛 잘 드는 물가 근처에 옮겨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수목원과
석사후연구원 안은주 임업연구사 윤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