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ZINE VOL.125
전시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씨앗,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식물도 자신의 후손인 씨앗을 건강하게 키워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합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한 초기 단계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고, 최종 목표는 잘 자란 씨앗을 살기 좋은 곳에 정착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물들의 종족보존을 위한 과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이가 정원사입니다.
장구채 열매 속의 씨앗들
포자식물 사이에서 씨앗으로 번식하는 식물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씨앗으로 인해 건조한 곳에서도 식물이 살 수 있게 되었고, 추위와 더위를 극복할 방법을 찾게 되었으며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매우 넓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식물만의 변화가 아니라 지구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전체 생명의 역사까지 더욱 풍요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댕댕이덩굴(방기과)
정향풀(협죽도과)
등칡(쥐방울덩굴과)
장구채(석죽과)
호장근(마디풀과)
세잎승마(미나리아재비과)
다양한 모양의 씨앗들
특이한 문양을 가진 씨앗은 때때로 디자이너들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 석죽과의 많은 씨앗은 표면에 화려한 패턴의 돌기들이 있어서 마디풀과의 매끈하고 윤기 나는 씨앗들과 비교됩니다. 댕댕이덩굴 씨앗의 기하학적 문양이나 다양한 형태를 지닌 여러 씨앗의 독특함 속에는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진화의 비밀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바람으로 이동하는 눈빛승마 씨앗
동물에게 먹혀서 이동하는 백당나무 씨앗
씨앗이 가진 중요한 능력은 공간을 이동하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씨앗이 휴면하기 때문에 가능한데, 잠을 자면서 적절한 주변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입니다. 휴면 상태는 가뭄이나 추위에서도 잘 버틸 수 있게 하며, 그러다가 따뜻해지고 수분이 충분해지는 미래의 시간에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시간 여행자의 최고 고수라면 연꽃의 씨앗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묻혀있었던 연씨가 발아에 성공하고 꽃을 피웠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씨앗의 껍질이 벌어지면서 뿌리가 나오는 정향풀의 발아 과정
또 다른 씨앗의 능력은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일단 발아가 시작되면 불가역적인 반응으로 돌이킬 수가 없으므로 너무 빨라도, 또 너무 지체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변 환경을 체크하면서 발아 시기를 결정하는 역할은 씨앗의 껍질이 담당합니다. 이들의 껍질은 식물종마다 두께도 다르고 질감도 차이가 있어서 물을 흡수하는 정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발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달라집니다.

올해 파종한 100여 종 중에서 발아되기까지의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된 식물은 크고 단단한 씨앗의 해녀콩이었습니다. 5일 동안 물속에 담가서 충분히 불린 후에 배양토에 심었음에도 60일 이상이 지나서야 연둣빛 어린싹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시간차를 두고 하나둘씩 서서히 발아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고수들의 투자전략은 아마도 해녀콩이 먼저 체득한 것 같습니다.
해녀콩(2020.02.23. 파종)
해녀콩(2020.05.04. 발아)
반면에 발아까지의 시간이 가장 짧았던 식물은 형개와 개맨드라미였는데, 10일도 걸리지 않았고 대부분의 개체가 거의 동시에 땅 위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는 한해살이풀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보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성장과 생식과정을 모두 마쳐야 하는 이들은 무리 지어 함께 자라는 것이 유리해 보입니다.
형개 (파종 05.11, 발아 05.18)
개맨드라미 (파종 04.28, 발아 05.04)
씨앗 속의 어린싹이 지상부로 올라오는 과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갈고리 형태를 만들어 등으로 밀면서 발아하는 것도 성장부위인 정단 분열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작은 식물호르몬인 에틸렌이 줄기를 비대칭으로 성장시켜서 구부러진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후크는 어두운 곳에서 더 많이 구부러지고 햇빛을 만나면 곧게 펴집니다.
아주까리
돌동부
솔나리
떡잎은 선발대로 나서서 길을 개척해주고 궂은일들을 처리한 후에 본잎으로 양분까지 모두 전달해준 후에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시들어 버립니다. 처음으로 자라나오는 본잎은 떡잎과 달리 자신의 유전자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다른 식물종과의 구분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독립된 개체로서 본격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1.곰취
2.바늘엉겅퀴
3.두메고들빼기
국화과의 떡잎과 첫 번째 본잎
1.참당귀
2.갯기름나물
3.고본
산형과의 떡잎과 첫 번째 본잎
파종작업을 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식물과 더 친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발아 기작을 지닌 개성 강한 씨앗들을 만나는 것은 뜻밖의 즐거움입니다. 씨앗이 발아할 때는 뿌리가 제일 먼저 출현하는 것이 기본이건만, 늘 그러하듯이 예외적인 식물이 있습니다. 연꽃이나 마름 같은 수생식물들은 잎이 될 부분이 먼저 물 위쪽을 향해 길게 자란 후에 뿌리 쪽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씨앗 속의 양분을 다 소비하기 전에 잎이 광합성을 할 수 있어야만 이후에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잎이 될 부분이 먼저 나오는 연의 씨앗
완전히 자란 연잎
더 놀라운 씨앗도 있습니다. 우산나물은 국화과 식물임에도 씨앗에서 처음 올라오는 떡잎이 1장뿐입니다. 쌍떡잎식물군에 속하는 식물이 떡잎이 2장이 아니라 외떡잎식물처럼 1장이라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그것은 우산나물속(Syneilesis)이 지닌 특징입니다. 씨앗의 발달과정에서 1장의 떡잎으로 둥글게 말려서 성숙하게 되었던 것으로, 속명도 ‘합착하여 말려있는 떡잎’을 의미합니다.
돌돌 말려서 나오는 떡잎
넓게 펴지는 1장의 떡잎
첫 번째 본잎
우산나물
씨앗이 겉으로 보이는 크기는 작아도 그 속에 담겨있는 응축된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씨앗은 살아있는 다이너마이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참고문헌>
1.Yu Hong, Lian-Sheng Xu, Chen Ren, Qin-Er Yang. 2016. Lectotypification of Syneilesis australis (Asteraceae: Senecioneae). Phytotaxa 246:152-154.
2.이상태. 식물의 역사. 지오북. 2010.
3.이진범. 식물생리학. 라이프사이언스. 2016.
4.이창복. 원색 대한식물도감. 향문사. 2006.
수목원과
석사후연구원 안은주     임업연구사 윤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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