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가정원 이야기
Ⅰ. 남원 몽심재 고택 [南原 夢心齋 古宅]
국립수목원 정원연구센터에서는 한국 민가정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공동으로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민가정원의 현황을 기록하고 종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결과의 일환으로 작년에는 경상도 지역의 민가정원 세 곳(경주 최부자댁, 함양 일두고택, 상주 우복종택)을 소개하였고, 매년 전라도, 충청도 등 순차적으로 각 지역의 민가정원을 소개하려 합니다. 올해 전라도 지역의 민가정원 소개는 남원 몽심재 고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는 남원으로 은둔합니다. 그는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의 영수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삼로(三老)로 불릴 만큼 우정이 두터웠던 인물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그를 좌의정으로 내정하고 조정에 나와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주나라 때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죽은 백이와 숙제를 비유한 ‘치주가’를 지어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치주가’가 송암일기에 전하는데, 정몽주의 선죽교 참변 소식을 들은 박문수가 사모하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서 지은 노래라고도 합니다. 그는 고사리를 캐서 정몽주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시구를 함께 지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격동류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
마을을 등지고 늘어 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이 시구를 들은 정몽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박문수의 14세손인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은 조선 시대의 가옥 한 채를 지으면서 위의 시에서 몽(夢)과 심(心)을 따와 집의 당호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원 몽심재(夢心齋) 고택입니다.
남원 몽심재 고택
죽산 박씨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의 후손입니다. 몽심재는 죽산 박씨의 소종가 중 하나입니다. 죽산 박씨가 남원에 터를 잡은 것은 송암 박문수의 손자인 박자량(朴子良)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인 박총(朴叢)이 이성계에게 협력한 공로로 박자량은 한성판윤에 제수됐지만, 숙부인 박포(朴苞)가 이방원에 대항하다 참수당하고 자신은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면서 처가인 남원 수지면 초리에 은둔하다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초리는 몽심재가 있는 호곡리에서 남쪽으로 4㎞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죽산 박씨 집안은 초리에서 300년 가까이 살다가 1700년대 초에 지금의 호곡리로 집단 이주하였습니다. 그것이 송암 박문수의 13세손인 박원유 때의 일입니다. 특정 유전자를 가진 문중 사람들만 걸린다는 문질(門疾)로 인해서 죽산 박씨들이 여기저기로 떠나면서 일파가 호곡리로 이주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죽산박씨의 ‘홈실시대’가 열린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홈실이라니, 마을 이름치고는 좀 이상야릇합니다. 호곡리(好谷里)인 이곳의 본래 이름이 호음실(虎音室)이었고, 그것을 줄여 홈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홈실마을은 죽산박씨 집성촌인 안홈실(내호곡)과 안홈실 일을 도맡아 했던 밧홈실(외호곡)로 나뉩니다. 모두 예전 말로 이제 두 마을 간에 차이는 없으니 다 같은 홈실마을입니다. 사실 몽심재가 자리한 터는 남원에서 손꼽히는 4대 명당 중 하나입니다. 풍수지리상 옆으로 누워 있는 호랑이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호두혈(虎頭血)입니다. 이 마을의 이름이 호음실(虎音室)이 된 것도 호랑이 울음이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것입니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많아 주민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라감사인 이서구가 호두산(虎頭山)이라는 이름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고, 호곡리(虎谷里)라는 마을 이름도 호곡리(好谷里)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몽심재는 지리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작은 구릉의 기슭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멀리 견두산이 병풍처럼 둘러막고 있고 집 앞에는 이 산에서 흘러나온 작은 개울이 서쪽으로 흐르며 개울 건너로 울창한 소나무 동산이 연결되어 운치가 있습니다. 트인 ㅁ자형으로, 사랑채와 중문채의 높이를 서로 다르게 배치하였습니다. 경사진 지형에 따라 건물의 높낮이를 달리해 앉게 한 것입니다. 안채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채의 터를 돋우었고, 하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등 아랫사람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이는 구조입니다.
몽심재는 한마디로 사람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는 가옥입니다. 한양을 오가는 많은 선비를 접객한 것도 '적선(積善)철학'을 가지고 행한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여자들을 위한 배려도 집안 이곳저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먼저 주인은 문간채에 딸린 정자인 요요정(樂樂亭)을 하인들에게 쉼터로 내주었습니다. 조선사회에서 양반의 전유 공간인 정자(亭子)를 하인들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이 쉼을 위한 정자는 사랑채에서는 각자(刻字)바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채 구조에서도 여종을 포함한 집안 여성에 대한 배려가 엿보입니다. 부엌마루가 딸린 안채 서쪽 지붕은 동쪽 지붕에 비해 길게 나와 있습니다. 많은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집안 여성을 비와 바람과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몽심재 고택의 정원과 식물
대문채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기 전에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몽심재 실천 명제들이 각자(刻字)되어 있습니다. 관리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主壹岩(주일암): 하나의 오롯한 마음으로 외부에 끌리거나 흩어지지 않고 온전한 한마음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으로, 사심과 잡념 없이
늘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 存心臺(존심대): 자신의 본심을 간직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 千蒼崖(천창애): 천길 푸른 낭떠러지 절벽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국운과 백성의 운명이 이와 같다고 생각하고 바위에 새겼습니다.
이는 몽심재 2대 주인 송곡 박주현(1844-1910)이 상해에 독립자금을 보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 靡他基適(미타기적): 마음이 그 일에 적실하여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게 한다. 즉, 내가 있는 곳에서 충실히 하라는 뜻입니다.
관리자는 이를 '다른 사람을 예쁘게 여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고 합니다.
몽심재 문간채 앞에는 ‘호족시’ 감나무가 있습니다. 호족시는 줄기 밑동과 뿌리 부분이 호랑이 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랑채 기단이 이중으로 높여진 까닭은 주변 환경의 지형적인 요소를 고려한 것입니다. 견두산 산비탈에 잡은 터를 훼손하지 않은 채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사랑채 옆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의 계단이 낮고 넓은 것은 긴 한복 치마를 입고 계단을 이용하는 여성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중문채 계단이 12개인 것은 하루를 12시로 나누었던 조선시대의 시간 개념과 관련 있습니다. 남성들에게는 늘 여성들을 배려하라는 뜻이, 여성들에게는 항상 조신하라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합니다. 관리자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예전에는 중문채에 막새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중문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연꽃처럼 보였을 것이고, 이는 불가의 사상 오탁진세(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마라)를 미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몽심재는 아직 복원 중입니다. 사랑 공간 서측에 행랑채 4칸과 대문채 서측에 2칸이 더 복원되어야 균형감 있게 전체적으로 복원되는 것이고, 이는 장기 복원 계획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복원은 순차적으로 진행 중인데, 복원 때마다 각 건물의 색깔이 다르게 복원되어 이곳을 방문했던 해외 연구자들이 매뉴얼도 없이 복원하는 것이 아닌지 꼬집는 바람에 난감해했다고 합니다.
중문채 앞쪽에 선인장이 있는데, 주인이 약 100여 년 전에 항암제로 사용하기 위해 식재했습니다. 얼마 전에 문화재청 관계자가 몽심재를 방문하여 선인장이 어울리지 않으니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리자 관점에서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제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리자가 주도한 초화류 식재계획은 몽심재 곳곳에 꽃을 심어 계절 따라 1년 내내 꽃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문채를 넘어서면 방문자는 사랑채 주변으로 핑크색과 하얀색의 낮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대낮에도 반깁니다. 특히, 몽심재를 오전에 방문하면 연못 주변에 활짝 핀 하늘색의 ‘아마’ 꽃과 그 아래에 선명한 핑크색의 꽃잔디가 함께 어우러져 자랍니다. 관목들도 함께 식재할 계획인데, 3년 정도로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몽심재, 죽산 박씨 종가에는 공통적으로 백일홍, 자목련(충절 의미), 백목련이 식재되어 있고, 담장이 낮습니다.
현재 몽심재는 원불교 교무 장덕원 씨가 2019년 1월부터 부임해 관리합니다. 그는 방치된 유물을 정리하는 등 곳곳을 청소하고, 정원에서 계절마다 꽃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그는 몽심재가 원불교의 소유가 아니라 자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하여 잘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옥스테이로 이용했지만, 앞으로 숙박은 지양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대신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고택의 숨겨진 가치와 의미를 전할 계획입니다.
몽심재는 터가 좋아서인지 2명의 재상과 55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했다고 합니다. 여성과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온 공간이기도 합니다. 구례나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들르는 선비나 찾아오는 손님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기로 전국에 소문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집안의 사람들이 행한 일들을 요즘 말로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겠습니다. 집의 구조와 공간 구성에 나타난 정신이 인간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는 좋은 예! 그것이 바로 남원 몽심재 고택입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수목원정원연구센터
박사급연구원 심지연 임업연구사 이경미 임업연구관 진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