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에 활용한
정원 만들기
Woodland garden의 역사
정원의 역사에 있어 나무가 주를 이루거나 산림식생을 모방하여 식재된 정원은 여러 시대와 문화권에서 나타났다. 고대 중동과 중국에서는 왕실의 사냥터로써 활용되기 위해 원림들이 관리되었고, 신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립은 니네베에 수도교와 양수기로 물을 끌어와 각종 녹음수와 과수가 심긴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중세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목재생산을 위한 맹아림과 사슴의 사육 및 수렵을 위한 사슴 공원(deer park)이 조성되었으며, 근세 이란과 북인도의 정원에서는 사분면으로 구획된 땅에 사과, 살구, 석류, 감귤류 등 각종 과수와 사이프러스, 플라타너스 등의 녹음수가 심겨 숲을 이루었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전통 정원들은 지형의 조성과 식물의 배식에 있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숲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조성되고 있는 woodland garden의 발상지는 영국이다. woodland garden의 등장은 19세기 말에 이루어졌으나, 그 기원은 관점에 따라 17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세 영국의 장원에는 땔감 등 임산물의 생산과 사냥을 위한 수림지대가 조성 및 관리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숲의 조성과 관리는 점차 그 주체의 귀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지되게 되었다. 한편 16세기경 영국은 장원에서 관리되는 땅을 제외하면 산림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심각한 산림자원 고갈을 겪었는데, 목재는 무기와 선박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중요하였기에 이는 당대의 상류층 사이에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식을 발생시켰다. 또한, 지주들은 인클로져 운동을 통해 점차 더 넓은 면적의 땅을 관습과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형성된 동인은 1664년 John Evelyn 이 저술한 의 출간을 계기로 17세기 후반 영국의 지주들 사이에 조림 사업의 유행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조림지들은 목재로서 가치가 높은 참나무류, 유럽너도밤나무, 유럽밤나무 등의 활엽수와 이들 활엽수의 치수를 보호할 보호수로써 식재된 구주소나무, 잎갈나무류, 가문비나무류 등의 키 큰 침엽수류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17세기 영국의 장원에서 숲은 사회경제적인 목적으로 주로 조성 및 관리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숲들이 심미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러한 숲들은 자연을 모방하여 각종 녹음수와 과수, 야생화를 심음으로써 조성된 wilderness라는 양식의 정원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영국의 철학가 Thomas Baker는 1625년 이상적인 군주의 정원을 논하면서 정원의 1/3은 관목림을 본떠 각종 야생화와 과수를 식재한 wilderness로 가꾸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Timothy Nourse 역시 1700년에 출간된 에서 이상적인 시골 장원의 정원의 형태를 논하면서 정원의 1/3은 전나무, 월계귀룽나무, 서양호랑가시나무, 라버넘, 라일락, 무궁화 등의 교관목을 배식하고 그 사이에 둔덕을 만들어 앵초류, 수선화, 데이지, 은방울꽃, 베스카딸기 등의 초화류를 심은 wilderness로서 가꾸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 국왕 찰스 1세와 프랑스 공주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의 혼인 이후, 1640년 무렵에는 영국에도 프랑스풍의 정형식 정원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식 정원 특유의 생울타리 내부에 정형적으로 나무를 식재하는 기법은 크게 유행하지 못하였고, 4점식재나 5점식재가 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세기 초에 들어서는 수목을 키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치하거나 생울타리 사이에 꽃피는 관목을 혼식하는 등 독자적인 배식법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Batty Langley의 설계와 같이 정형식 정원과 비정형식 정원의 요소가 혼합된 과도기적인 정원디자인으로 이어졌으며,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픽처레스크(picturesque) 양식의 영국식 풍경정원(English landscape garden)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그랜드 투어를 통해 유럽 본토의 풍광을 접한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 발생한 비정형적이고 자연적인 풍광에 대한 수요와, 극동으로부터 수입된 상품에 묘사된 동북아시아 비정형식 정원 전통과의 접촉에 기반하여 발달한 픽쳐레스크 양식은 관리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관리되지 않은 자연의 숭고함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풍경화와 같이 목초로 덮인 구릉과 무작위적으로 군락을 이루도록 배식된 수목, 인공적으로 조성된 폐허(folly)로 구성된 경관을 특징으로 하였다. 수목의 배식은 화가들이 대기원근법을 활용하는 것과 같이 엽색이 짙은 수종을 전방에, 엽색이 옅은 수종을 후방에 배치하는 원칙을 따랐다. William Kent에 의해 최초의 픽처레스크 양식의 정원이 조성되기 시작한 이후, Lancelot ‘Capabillity’ Brown과 Humphry Repton 등 대가들의 작업을 통해 영국식 풍경정원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풍경정원들은 기존에 존재하던 17세기의 조림지와 wilderness를 바탕으로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픽처레스크 양식은 자연을 지나치게 모방한 나머지 정원의 본질을 상실하였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의 선두에 선 것은 John Loudon으로, 그는 정원이 순수한 자연과 구분되기 위해서는 대칭적인 요소의 도입, 이국적인 식물의 활용, 식물 개체의 온전한 형태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원다움을 강조하는 양식인 가드네스크(gardenesque) 양식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영향으로 수목의 배식 역시 각 개체의 형태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간격을 두고 식재되었으며, 생물학적 분류에 맞추어 과나 속 단위로 정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식방법은 수목원(arboretum)의 기원이 되었으며, 당대 미송이나 개잎갈나무, 아라우카리아 아라우카나 등 새로운 침엽수의 도입이 이어짐에 따라 침엽수원(pinetum)의 유행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Loudon은 초화류 화단에 대해서 화색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화훼류를 혼식하는 것보다는 동일한 화훼류를 군식하여 순차적으로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한편으로는 일년생 초화류와 구근류로 구성된 양탄자화단(carpet bedding)의 등장으로 이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무의 배식기법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화단에서 초화류를 화색에 따라 배합하는 것과 같이 수림에도 수목과 관목, 숙근초를 군식함으로써 색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원예가 William Paul은 1866년부터 1867년까지 주간지 에 수목의 수형과 엽색, 단풍의 색, 꽃과 열매의 색 등을 주제로 하는 기고문을 투고하였으며, 1870년 옥스퍼드 화훼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회의에서는 녹색 일변도인 기존의 정원에서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색상을 지닌 수목을 활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영국의 환경에 적응성을 지녀 최소한의 관리만으로도 정착하고 군락으로 발달할 수 있는 식물을 활용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wild garden 의 개념을 제창한 정원평론가 William Robinson 역시 Gertrude Jekyll 의 영향 하에 정원에서의 색채 활용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사조의 변화는 공교롭게도 이를 뒷받침할 다양한 식물소재의 도입과 맞물렸다. 19세기는 전세계로부터 새로이 발견된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유럽, 특히 영국으로 활발히 도입되던 시기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의 기간에는 이베리아 반도와 코카서스, 북미로부터 다양한 만병초와 철쭉류가 도입되었고, 1820년대에는 David Douglas의 활약을 통해 북미로부터 각종 교목들의 종자가 영국으로 도입되었다. 1830년에는 스파이 혐의로 일본으로부터 추방된 Philipp von Siebold 가 귀국하면서 수국, 동백을 비롯한 80여종의 일본산 식물을 유럽으로 도입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의 체결로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Robert Fortune 은 중국을 탐험하며 붉은병꽃나무, 영춘화, 운금만병초 등 다양한 화목류를 영국으로 도입하였으며, 1848년 인도에 도착한 Joseph Hooker 는 히말라야 산맥의 중턱에서 수많은 만병초류를 발견하고 도입하였다. 이후 1858년 톈진조약 이후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식물들을 다수 발견하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유럽으로 도입된 식물은 적었으나, 선교사들이 보낸 표본으로부터 관상식물로의 잠재성을 감지한 유럽의 양묘업자들은 이 식물들을 경쟁사보다 먼저 도입하기 위해 앞다투어 식물채집가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수건나무나 함소화 등 더욱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유럽에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목번성 관상식물들은 지난 반세기와 그 이전 구미권에 조성되어 있었던 수목원, 침엽수원, 풍경식 정원의 수림지대의 하층에 식재하기 적합하였고, 이는 정원에 색채를 더하고자 하는 사조와 부합하였다. 또한 당대 중국과 인도를 탐험한 식물채집가 및 탐험가들의 기록은 본토의 정원에서 이러한 이국의 풍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수요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요인들은 결국 19세기 말 woodland garden 의 탄생과 20세기 초 woodland garden의 전성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에 들어 woodland garden 은 양차대전 이후 관리의 미비로 인한 식재구성의 단순화 및 경관 손실과,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에 의한 정원디자인의 유행 변화에 의해 그 위상을 잃게 되었으며, 단순히 만병초 등 산림식물에 대한 수집욕의 결과물일 뿐으로 그 어떤 디자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plantsman’s garden” 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하였다. 오늘날, woodland garden은 생태주의와 자연주의적 정원양식의 유행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화목류의 군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음지식물 특유의 형태와 질감에 기반하여 연중 흥미를 제공하고 생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woodland garden이 언젠가 다시 유행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정원연구센터
석사급연구원 이문규 임업연구사 송수정 임업연구관 배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