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멧돼지, 미워도 다시 한번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사람들의 옷도 두꺼워집니다. 전시원의 나무들도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기 시작합니다. 나무들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다가올 겨울을 위해 열심히 먹이를 찾으러 전시원을 누빕니다.
날씨가 추워져도 정원사의 하루의 시작은 평소와 같습니다. 전시원을 돌아보는 것으로 식물 하나하나 눈을 맞춰가며 밤사이 키가 더 컸는지, 꽃봉오리를 올렸는지 안부를 묻습니다. 이 시기에 정원사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먹이를 찾아온 동물들의 흔적이 있는지도 주의 깊게 살핍니다.
어젯밤 사이에 손님이 다녀갔습니다. 거하게 식사를 하고 갔는지 한바탕 전시원이 뒤집혀 있습니다. 움푹움푹 깊게 팬 발자국과 길게 흙을 밀어낸 자국들. 누가 다녀간 걸까요?
바로 돼지 중에 돼지 “멧돼지”입니다. 이 시기에는 멧돼지 가족들이 밤 소풍을 다니며 외식을 자주 즐깁니다. 멧돼지는 주로 식물성 먹이(나무뿌리, 식물)를 섭취하지만, 상황에 따라 동물성 먹이(소형 포유류, 지렁이)도 섭취하는 편식을 하지 않는 잡식동물입니다. 시기별로 멧돼지 먹이에 차이가 나타나는데 평소에는 멧돼지의 길쭉한 주둥이로 먹잇감을 찾아 땅을 파헤쳐 나무뿌리나 식물을 먹습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동물성 먹이 즉 소형 포유류를 많이 먹고, 봄과 여름에는 지렁이를 먹으면서 단백질을 섭취하기도 합니다.
특히 약용식물처럼 사람 몸에도 좋고 맛있는 식물들이 멧돼지도 맛있다는 걸 증명하듯 영리한 멧돼지들이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약용식물원을 방문합니다. 또한 거의 매일 제초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서인지 약용식물원의 땅은 부드럽고 촉촉하여 후각이 뛰어난 멧돼지들이 더 잘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원사들이 설치한 불빛 퇴치기도 이제는 무용지물입니다. 보란 듯이 식물을 해치우고 퇴치기를 쓰러트리고 갔습니다.
또한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심은 지 얼마 안 된 무궁화는 통째로 들려 있고, 식물의 윗부분이 끊어지지 않은 채 뽑혀있는 등 멧돼지가 헤집고 간 전시원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희귀특산식물전시원에 있는 연못은 멧돼지들이 자주 찾는 진흙 샤워장입니다. 땀샘이 없는 멧돼지는 체온조절이 어려워 직접 진흙 샤워를 하면서 체온조절을 하거나 몸에 붙은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해 샤워를 한 뒤 근처 나무에 비비기도 합니다. 멧돼지들이 샤워하고 나면 넓은 웅덩이가 생기게 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웅덩이의 크기가 넓어 정원사의 눈에 바로 띄어 빠르게 발견하여 대처할 수 있습니다.
멧돼지는 예민한 청각과 후각을 가진 대신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밤 산책을 하는 멧돼지들에게 전시원 곳곳에 꽂힌 검은색 표찰은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알미늄으로 만들어진 표찰이 쉽게 휘어진 채 꽂혀있는 모습을 보면 지방층이 두꺼운 멧돼지는 단단한 피부층과 강한 힘을 가진 멧돼지의 소행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멧돼지 가족들이 식사를 끝내고 간 전시원의 식물들은 그야말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처럼 다친 채로 힘없이 누워있습니다. 이럴 때 정원사는 빠르게 전시원 내 멧돼지들의 흔적을 파악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움직입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뿌리가 땅 위에 드러난 채 말라가는 식물입니다. 뿌리가 오래 노출되면 말라버려서 식물이 죽기 때문에 최대한 발견 즉시 땅에 다시 심어줍니다. 그리고 물을 주어 말라버린 뿌리를 촉촉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나마 뿌리째 발견된 식물들은 기회가 있지만, 아예 식물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지렁이나 벌레를 먹기 위해 파헤친 땅을 고르게 펴주며 정리하는 것입니다. 먹이를 찾으면서 이리저리 헤쳐놓은 땅은 울퉁불퉁 지저분해 보이고 촉촉했던 땅을 말라가게 합니다. 이렇게 흙을 깊게 뒤엎은 멧돼지 덕분에 잡초가 손쉽게 뽑히기도 해서 밉지만 아주 조금은 고맙기도 합니다.
또 멧돼지가 식물들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식물이 꺾인 부분이 있으면 잘라내어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지난 10월에 약용식물원뿐만 아니라 전시원 내 곳곳에 찾아온 멧돼지들에 의한 피해 면적이 아주 컸습니다. 또 멧돼지의 첫 방문 후로 여러 번 식물들이 피해를 보았고 정원사들은 매일매일 전시원을 긴장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전시원의 “자식 같은” 식물들을 지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작업을 준비합니다. 피해를 줄이는 작업으로 식물보호망을 씌웁니다. 긴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기 때문에 코가 땅에 닿을 때 가시에 찔려 파헤치지 못하도록 가시가 달린 가지를 군데군데 설치해놓습니다. 이때 사용한 나뭇가지는 곰딸기, 복분자딸기, 아카시아속(열대온실) 식물 등 매서운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주변에 설치를 합니다.
전시원을 뒤집어 놓은 멧돼지가 정원사로서는 참 밉지만, 이런 멧돼지도 자연에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멧돼지가 파헤친 곳은 흙 속에 공기가 들어가게 되어 비옥해집니다. 또, 멧돼지가 가진 거친 털에 씨앗들이 매달려 멀리 이동하여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식물의 종류를 많아지게 한다는 (식물의 종다양도 증가) 결과도 있습니다.
전시원을 구경하시다가 위 사진들 같은 모습을 보셨다면 지저분하게 관리한다고 생각하시기보다는 “이곳은 멧돼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이구나” 혹은 “멧돼지가 어젯밤에 왔다 갔구나”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국립수목원 전시원이 들려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참고문헌>
1. 멧돼지에 의한 농작물 피해 요인 분석-경남 거창군 사례를 중심으로, 이성민, 이은재, 박희복, 서창완, 한국환경생태학회지, 2018
2. 혼효림에서의 멧돼지 비빔목 선택과 생태적 역할, 이성민, 이우신, 한국임학회지, 2014
3. 멧돼지 서식지 이용 특성 파악 및 피해방지기술 개발, 이우신, 서울대학교 산합협력단, 2014
전시교육연구과
연구원 김가은 양지우 임선미 이수호 김보라 안은주 채해용
임업연구사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