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무 깊이 알기
섬은 왜 우리에게 낭만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섬은 낭만적인 상상을 하게 만드는 곳이지만 섬으로의 조사 여정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전남 여수시의 거문도도 그렇다. 낭만이 아니라 열정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그곳에 미지의 식물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운 것은 모두 섬이 된다고 했다.
그리움은 ‘단절’이라는 요소가 만들어내는 감정이기에 가늠하기 어려운 크기와 방향성을 가지며, ‘부재’와 ‘결핍’으로 이어지면
망망대해의 섬처럼 의식 속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물리적으로 닿기 어려운 시공간의 섬일수록 낭만적인 상상이 더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로 떠나는 머나먼 섬으로의 여정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이동에 드는 경비야 연구비에서 대주지만 수년째 고정된 식비로 고물가의 섬 지역에서 삼시세끼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빠듯한 것이 사실이다.
또 섬에서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그 비용도 일비에서 조달해야 하다 보니 어지간히 먼 거리가 아니면 평생 무료인 두 다리를 이용한다.
길도 없는 거친 산과 급경사의 험지를 오르는 중노동은 각자의 체력이 알아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모기·쐐기·벌 등 각종 벌레에 시달리는 일, 풀독 오르는 일, 가시덤불에 긁혀 생채기 나는 일, 더위 먹는 일 따위는 덤이다.
섬에서의 불편한 숙식 여건을 감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날그날의 날씨를 잘 체크해서 산에서 먹을 식량을 준비하고
미리 정한 동선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며, 일기에 따라 바뀌는 배편도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에 십상이라 이래저래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도 섬은 너무나 매력적인 조사지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섬일수록 식생이 훼손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지형이나 기후 여건 등에 따라
독특한 식생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적으로 섬이라는 공간이 갖는 ‘단절’이라는 요소는 지리적 격리와 생식적 격리를 의미하므로 희귀종이 분포하거나 고유종이 만들어지기에 좋다.
전남 여수시에 속한 거문도도 그렇다. 육지 이동에만 편도 7시간이 걸리고 뱃길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 긴 이동 시간만큼이나 독특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일단 거문도에는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문 박달목서가 대량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조사에서는 줄기가 10개로 갈라지고 밑동 지름 90.1㎝에 높이가 12m나 되는 거대한 박달목서를 발견해 야장(野帳)을 펼쳤다.
그동안 꽃이나 열매를 보기 어려웠던 섬회나무(Euonymus nitidus)는 가슴높이지름 45㎝에 키가 7m에 이르는 거목을 발견해
열매를 확보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회나무와 비교해 섬회나무는 열매가 1.5~2배 정도 더 크고 4개의 능각이 있는 점이 다르다.
거문도가 북방한계지로 보이는 송양나무(Ehretia acuminata)도 큰 나무 여러 그루를 확인했다.
개화기가 지나 이제 막 결실하는 모습이었다. 송양나무는 지치과의 목본이며 형태적 변이가 심해 다양한 변종으로 나뉜다고 한다.
이번 조사의 백미는 단연 덩굴옻나무(Toxicodendron orientale)였다.
주변 섬인 하백도와 광도에서 분포가 확인된 적은 있지만, 거문도에서의 분포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던 희귀식물이다.
옻나무속 식물의 권위자인 정재민 박사님께서 2013년 5월 21일 자로 발견한 기록이 개인 SNS에 올려져 있고,
최근 들어 아마추어 동호인에 의한 기록이 검색되기는 하나 공식적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발견한 덩굴옻나무는 거목인 데다 열매를 많이 달고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홍릉수목원의 미국덩굴옻나무(Toxicodendron radicans)와 국립수목원의 덩굴옻나무에서 수꽃 없이 암꽃만으로 결실하는 모습이
관찰되므로 덩굴옻나무도 감태나무처럼 아포믹시스(apomixis, 무수정생식)를 할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결실률이 높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자생지의 덩굴옻나무에서도 그런 점을 확인한 셈이다.
거문도의 덩굴옻나무에서 수꽃을 보지 못했다는 어느 동호인의 기록도 덩굴옻나무의 아포믹시스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수꽃이 피는 수그루가 섬 어딘가에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암꽃의 결실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위와 같은 수확이 있었지만, 낭만은 없다.
모기한테 팔에만 마흔여덟 방을 물어뜯긴 연구원, 쐐기에 쏘인 건지 팔뚝에 붉은 반점이 점점 솟는 위촉연구원,
그리고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덩굴옻나무에서 혼자 영광의 옻독이 올라 간지러움에 시달리는 박사후연구원까지 모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산에서 본 새끼 살무사와 숙소에서 잡은 집바퀴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 것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제니까.
하지만 날씨는 다르다.
섬에서 나가려던 날,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불안정한 일기만큼이나 불안정한 배편은 끝내 결항 소식을 알린다.
어떻게 하지? 비 내리는 섬에 갇혀 하루 더 묵어야 하나? 그럼 토요일 특근 쳐주는 건가?
혹시 하루가 아니라 며칠 더 걸리면 어쩌지? 이런 불안에 시달리던 중 뒤늦게 와서 정박해 있던 늠름한 모습의 화물선 ‘평화훼리11호’가 희망을 준다.
3시간이나 걸리는 점이 문제지만 섬에서의 탈출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표를 끊는다.
두 번 다시 안 올 것처럼 재빨리 배로 몸을 옮겨 싣는다.
느릿하게 멀어지는 거문도항을 바라보면서 심신이 안정되자 뇌에서 한다는 생각! ‘내년에 다시 와야겠네... 꽃 필 때! 이번보다 한 달 정도 빨리 오면 될까?’
비경이래도 감상할 틈 없는 강행군이면 비경이 아니다. 거문도에서도 그랬다.
백도가 어슴푸레 보이는 관백정에 둘러앉아 연양갱과 미니소시지 꼬마장사를 나눠 먹으며 쉬는 것 정도가 거의 유일한 낭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섬은 우리에게 결코 낭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이 있느냐고 물을 뿐이다.
글쓴이
광릉숲보전센터
전문위원 이동혁
임업연구사 조용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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