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무 깊이 알기
너만 있으면 돼! 천선과나무와 좀벌의 상생과 공멸의 계약서
교목처럼 자라는, 제주도 제주시 비양도의 천선과나무
천선과나무가 주머니 모양의 화서를 만드는 이유는 천선과좀벌을 이용해 수분하기 위해서다.
복잡하고 정교한 그 과정의 비밀을 엿보고,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지 모를 그들의 위험한 계약서에 대해 알아보자.
천선과나무(Ficus erecta Thunb.)는 주머니 모양의 화서(花序) 안에 꽃을 만들어두는 식물이다.
꽃을 드러내어 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 피는 전략인데, 그것은 천선과나무가 천선과좀벌(Blastophaga nipponica Grandi)과 맺은 수분(受粉) 계약 때문에 기획되었다.
천선과나무는 국내에서 모람, 애기모람과 함께 특정 좀벌을 이용해 수분하는 식물 중 하나이다.
남부지방의 바닷가 근처 산지에서 주로 자라다 보니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어려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럴 땐 비슷한 나무로 무화과나무를 떠올리면 된다.
꽃 없이 열매 맺는 나무라는 뜻에서 무화과(無花果)나무라고 부르지만 무화과나무속(Ficus) 식물은 은두화서(隱頭花序, hypanthodium) 안에 꽃을 마련한다.
꽃이 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 보니 밖에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다만, 무화과나무는 과실을 얻기 위한 재배용이다 보니 무성생식으로 과낭이 비대해지는(결실하는) 점이 다르다.
유사종 중 하나인 꾸지뽕나무의 화서가 밖을 향해 피는 꽃들의 모음이라면 천선과나무는 그것을 반대로 뒤집어 꽃들을 안쪽으로 배치시킨 화서라고 이해하면 된다.
암수딴그루인 천선과나무가 천선과좀벌을 이용해 수분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다.
일단, 수화낭에는 수꽃과 충영꽃(벌레 든 꽃)이 섞여 있다.
1년차 수화낭에서는 천선과좀벌이 산란한 충영꽃만 성숙한다.
월동한 2년차 수화낭에서는 7~8월쯤에 천선과좀벌이 부화한다.
수컷이 먼저 부화한 다음 뒤이어 암컷이 부화하면 짝짓기를 한다.
짝짓기를 마친 수컷은 바깥세상 구경은 해보지도 못한 채 수화낭 안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평생 수화낭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므로 날개가 퇴화해 생김새가 벌보다 벼룩에 가깝다.
2년차 수화낭은 천선과좀벌의 부화시기에 맞춰 수꽃의 꽃밥에서 꽃가루를 터뜨리고, 상부의 구멍을 열어 암컷을 위한 탈출구를 낸다.
2년차 수화낭의 크기가 매우 커져 있고 대개 붉은색을 띠므로 열매처럼 보이지만 맛보겠다고 입에 넣는다면 천선과좀벌을 먹는 셈이 되므로 유의해야 한다.
임신한 암컷은 짝짓기와 수화낭 탈출 과정에서 꽃가루를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와 새로운 산란 장소(1년차 수화낭과 암화낭)를 향해 날아간다.
여기서 천선과좀벌 암컷의 운명이 갈린다.
1년차 수화낭으로 가느냐 암화낭으로 가느냐에 따라 산란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선, 암화낭으로 들어간 암컷의 운명은 산란 실패다.
암컷은 천선과나무 암꽃의 씨방에 산란관을 꽂으려고 애쓰지만 낭창낭창한 암꽃의 구조상 그러지 못해 실패한 채 암화낭 안에서 생을 마친다.
그 과정에서 천선과나무의 수분이 이루어지며, 수분된 암화낭은 벽이 얇아지고 말랑말랑해지면서 흑자색으로 익는다.
단맛이 나서 식용할 수 있으나 그 안에는 미처 산란하지 못한 천선과좀벌 암컷의 시신이 녹아 있다.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이라는 뜻에서 천선과(天仙果)라고 한다지만 신선이 먹기에는 너무 작고 내용물이 좀 꺼림칙하다.
한편, 1년차 수화낭으로 들어간 암컷의 운명은 산란 성공이다.
수화낭 충영꽃의 씨방에 산란해서 소임을 다한 암컷은 죽고, 수화낭은 가지에 달린 채로 월동하면서 이듬해 천선과좀벌의 부화시기를 기다린다.
충영꽃은 암술 또는 씨방이 변형된 부위에 천선과좀벌이 든 꽃을 말한다.
즉, 천선과좀벌이 부화 장소로 이용하는 꽃이다.
그러므로 수화낭에 든 꽃은 형태적으로 양성화처럼 보이지만 결실하지 못하므로 충영꽃이든 아니든 기능적으로 수꽃 역할을 한다.
형태적으로 양성화 모습이더라도 우리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꽃의 성 체제를 판별한다.
예를 들어, 까마귀밥나무의 단성화는 암꽃과 수꽃 모두 암술과 수술이 존재하므로 둘 다 양성화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까마귀밥나무를 양성화가 아니라 암수딴그루로 본다.
형태적인 모습보다 기능적인 역할로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져서 천선과나무 꽃의 성 체제는 암수딴그루가 아니라 암꽃양성화딴그루다’라고 하는 주장은 꽃의 기능적인 역할의 중요성을 간과한 단견에 불과하다.
천선과좀벌을 이용한 천선과나무의 수분 과정에서 기본이 되는 전제가 하나 있다.
천선과좀벌은 천선과나무의 암화낭과 수화낭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천선과좀벌이 암화낭과 수화낭을 구분할 수 있다면 산란할 수 있는 수화낭만 들어가고 암화낭은 외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선과나무의 수분과 결실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종족보존이라는 대의를 지켜낼 수 없다.
천선과좀벌은 천선과나무의 화분 매개만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특정 식물이 특정 곤충하고만 화분 매개 관계를 맺었을 때의 장단점은 극명하다.
수분 가능성이 매우 큰 대신에 혹시라도 해당 곤충이 사라지면 수분이 되지 않아 멸종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곤충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식물에만 의지해 번식하다 보면 해당 식물이 존재할 때는 번식 성공률을 보장받지만, 행여 그 식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게 되는 일은 시간문제다.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제안했는지 모르겠으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공멸할 수 있다는 위험한 계약서에 사인한 것이다.
그런 이상 이들의 관계는 중단할 수 없다.
끝은 알 수 없으나 끝이 오지 않는 한 끝없이 지속되는 그들의 관계에서 인간은 작고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
글쓴이
광릉숲보전센터
전문위원 이동혁
임업연구사 조용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