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식물 깊이 알기
협동의 진화를 위한 배신의 최소화를 위하여
서울족도리풀(경기도 포천시 국립수목원)
진사회성 곤충인 개미가 서울족도리풀의 열매에서 씨를 꺼내는 협동 장면에서 자기희생, 그리고 협동의 진화라는 수수께끼를 떠올린다.
이타성을 증가시키며 협동을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배신의 최소화다.
산림교육원 인근 계곡에서 광릉숲 식물상 조사를 할 때였다.
서울족도리풀의 열매 주위로 개미들이 잔뜩 몰려들어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숲 그늘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 몇 장 찍어두고는 나중에 확인해 보다가 나지막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사진에는 엘라이오솜이 붙은 서울족도리풀의 씨를 열심히 가져가는 개미들의 아름다운 협동 장면이 찍혀 있었다.
씨가 크고 무거워서 그런지 몇 마리는 서울족도리풀의 열매 안으로 들어가서 채굴하듯이 씨를 떼어내고, 그 씨 하나에 두어 마리가 달라붙어 집으로 운반하는 모습이었다.
개미를 왜 진사회성 곤충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족도리풀의 열매에서 씨를 빼내는 개미들
서울족도리풀의 씨를 운반하는 개미들
『지구의 정복자』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에 의하면 진사회성(eusociality)은
두 세대 이상이 함께 살면서 새끼를 키우고 협력하며 이타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타적 행위라는 말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 동물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 정도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진사회성 집단은 자기희생(self sacrifice)을 할 줄 아는 구성원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알려진 진사회성 동물은 개미, 벌, 인간 등 20여 종뿐이라고 한다.
서울족도리풀 열매의 횡단면
엘라이오솜이 붙은 서울족도리풀 씨
찰스 다윈은 진사회성 곤충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자기희생적 행동이 자신의 자연선택 이론에 위협이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다윈은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식으로 도덕성이 진화한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를 집단 선택론(group selection)이라고 한다.
자연이 선택하는 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이야기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기본적으로 개체 수준에 작용한다고 믿었기에 인간의 도덕성의 진화를 설명하는 대목 외에는 집단 선택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집단이나 개체가 아닌 유전자에 주목했다.
동물의 수많은 이타적 행동은 무늬만 이타적일 뿐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기적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현상의 비밀을 푸는 만능열쇠는 아니기에 논란은 계속된다.

키아누 리브스(Keanu Reeves) 주연의 2005년 영화 ‘콘스탄틴(Constantine)’의 결말 장면에도 자기희생이 나온다.
영화의 스토리상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고, 지옥으로 가야 한다.
어렸을 적에 이미 한 차례 자살 시도로 지옥행이 결정된 주인공 존 콘스탄틴은 안젤라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악마인 루시퍼를 부르려고 두 번째 자살 시도를 한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루시퍼는 콘스탄틴 덕에 아들의 배신을 막을 수 있었다며 빚을 졌으니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죽어가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구걸할 줄 알았던 루시퍼의 예상과 달리 콘스탄틴은 억울한 자살 시도로 지옥에 간 이사벨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이미 죽은 이를 신경 쓰는 콘스탄틴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루시퍼는 순식간에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고는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만 끝내 끌고 가지 못한다.
그때 루시퍼가 읊조리는 말이 바로 “The Sacrifice.”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루시퍼를 불러내 지옥에 있는 이사벨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한 콘스탄틴의 행동이 바로 자기희생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자살 시도로 천국에 갈 수 없었지만, 성격이 다른 두 번째 자살 시도로 천국에 갈 수 있게 됐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바람에 루시퍼는 콘스탄틴을 순순히 천국으로 보내줄 수 없으니 오랫동안 살아서 네 영혼은 지옥이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하라며
말기 폐암과 자살 시도로 죽어가던 그의 폐에서 폐암 덩어리를 양손으로 꺼내고 손목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하는 극적 외과수술(?)로 살려놓고 사라진다.
진정한 구원에 이른 자를 신께서 되살리는 데 악마의 능력을 이용하다니 정말 재미있는 영화적 설정이다.
인간을 대신해 죽은 예수님처럼 기독교의 영원한 가치인 자기희생을 부각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다분히 종교적이다.
선과 악을 넘나드는 콘스탄틴을 통해 선과 악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따라 누구에게나 발현될 수 있는 본성임을 알려준다.
악마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이 자기희생이므로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가름하는 잣대라는 사실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처럼 극명한 자기희생이 아니라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의 구분은 사실 상대적이다.
N극과 S극으로 되어 있지만 자를 때마다 계속 N극과 S극으로 나뉘는 막대자석처럼
선과 악은 아무리 정확히 구분해 놓는다고 해도 다시금 각각의 집단 내에서 선과 악이 갈리기 마련이다.
이타적 인간만 모아놓은 집단이라 해도 그 안에서 발현되는 속성의 정도에 따라 서로가 대비되어 선명성을 띠면 선과 악이 다시 나뉜다.
이기적 인간만 모인 집단에서도 더 악한 놈과 덜 악한 놈이 부대끼다 보면 그 안에서도 선과 악이 갈린다.
그러므로 영원히 이기적인 집단도 없고 영원히 이타적인 집단도 없다.
세상에는 이기적 개체와 이타적 개체가 섞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영원히 공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양적 평형(量的 平衡, quantitative equilibrium) 정도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는 이기적 유전자가 판을 쳐야 한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나 이태석 신부처럼 얇은 두께의 과학적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헌신적이고 숭고한 유전자를 가진 분들이 있다.
그분들이 비록 자기들과 같은 이타성의 유전자를 소유한 후손을 세상에 남기고 가진 않았지만,
유전자가 아닌 그분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모방하려는 사람들의 출현을 증폭시킬 것이 분명하다.
유전자 수준이 아닌 정신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그런 것을 밈(meme)이라고 부른대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다윈의 식탁』 132쪽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문제를 제시한다.
[40억 년 생명의 진화 역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벌어진 일대 사건들,
다시 말해 ‘상위 수준의 생명’에 관한 물음에서 생명은 어쨌건 최초의 복제자에서 시작해 DNA를 만들었고
그것이 모여 한 수준 위의 단세포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다세포를 만들었다.
즉, 주요 전환 사건들은 모두 새로운 상위 수준이 생기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전환 과정에서 협동의 진화 문제가 발생한다.
단세포는 왜 다른 세포들과 협동하여 더 큰 다세포 개체를 만들었을까?
이 과정에서 단세포는 틀림없이 배신의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했다.
오늘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암을 보라. 다른 세포들과 협력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복제하겠다는 배신자 아니겠는가?]
협동의 진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바로 배신임을 나타낸 글이다.
모두가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가운데서도 이기적인 배신자는 꼭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집단에서 협동의 진화를 위해 배신자의 최소화는 꼭 해결해야 할 문제다.
내가 상대방한테 무얼 해주었을 때 그 상대도 언젠가 내게 무언가를 보답해줄 것이라는 give and take에 대한 믿음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배신이다.
배신이 많이 행해지는 집단은 오래가지 못한다.
집단 내 배신의 최소화를 위해 서로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의 증폭이 필요했기에 종교가 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인간의 특성인 도덕성과 종교성이 집단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봐야 더 타당하다고 여기는 쪽에서는
개체 또는 유전자 수준에서만 하려는 리처드 도킨스식 논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기희생이란 숭고하고 거룩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타의 진사회성 동물과 달리 훨씬 더 복잡한 문화를 발달시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자기희생이 존재한다.
타인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었을 때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라든가,
자동차 여행에서 가장 불편한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내가 앉아서 가겠다는 것도 작지만 일종의 자기희생이다.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은 웹진을 자청해서 열심히 쓰는 일도 일종의 자기희생이라고 한다면 너무 억지일까?
배신은 이기적인 행위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넘쳐난대도 개체와 집단 수준에서 어떻게든 그 발현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벌이든 개미이든 인간이든 그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다.
상대가 절대 날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면 그것도 행복이 아닐까? 그가 완벽한 사기꾼만 아니라면 말이다.
글쓴이
광릉숲보전센터
전문위원 이동혁
임업연구사 손성원
(우)11186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로 509 대표전화 031-540-2000
COPYRIGHT ⓒ 국립수목원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