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식물 깊이 알기
밤나무를 알면 견과가 보인다
밤나무 열매는 견과(nut)로 분류한다.
우리가 흔히 견과류라고 부르는 것과는 약간 다른 개념의 열매 유형이다.
그런데 밤나무에서는 정확히 어떤 것을 열매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왜 그런지 이참에 열매의 세계에도 발 한번 담가보자.
『광릉숲의 큰나무』 책자를 거의 다 만들어 가던 중이었다.
밤나무를 소개한 짤막한 글에 문제가 좀 있다는 지적을 전달받았다.
‘열매가 가시처럼 생긴 총포에 싸이며 익으면 껍질이 벗겨지면서 진짜 열매를 드러낸다.’라고 한 부분이었다.
쓸 때는 몰랐는데 정말 어색하고 이상한 문장이었다.
열매가 익으면 껍질이 벗겨지면서 진짜 열매를 드러낸다니! 이걸 어떻게 수정하면 그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열매는 가시 덮인 총포에 싸이며 익으면 갈라지면서 그 안에 든 알밤을 드러낸다.’로 수정 요청을 했다.
이것은 밤알과 가시 덮인 총포까지를 모두 아울러 열매(밤송이)라고 할 수도 있고,
벌어진 밤송이 속에 든 밤만을 열매라고 할 수도 있기에 발생한 문제이다.
식물을 하다 보면 이렇게 꽃뿐 아니라 열매에서도 용어상의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다.
총포가 벌어지지 않은 밤송이
벌어진 총포 속의 열매
총포 속에 들어 있던 밤
위의 세 가지 유형 모두 밤나무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사실 전통적인 열매 유형의 분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교육 현장에서도 옛 자료로 학습하다 보면 현재의 지식과 충돌할 때가 많고, 학자마다 각 열매 유형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인 경우도 많아서 더욱 그렇다.
핵과와 장과, 견과와 위핵과의 구분만 해도 어느 자료가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발생학적 해부학적 근거에 의한 유형 분류를 시도해 Alexey V. F. Ch. Bobrov & Mikhail S. Romanov가 2018년에 발표한
「Morphogenesis of fruits and types of fruit of angiosperms」라는 논문 내용을 주목해 볼 만하다.
이 논문에서는 열매가 성숙했을 때 벌어지느냐 안 벌어지느냐에 따라 크게 개과(dehiscence)와 폐과(indehiscence)로 나누었다.
그러고 개과는 다시 골돌과(folicle)와 삭과(capsule)로 나누었으며, 폐과는 소견과(nutlet)와 핵과(drupe)와 장과(berry)와
경핵과(pyrenarium)과 호리병박과(amphisarca)와 견과(nut)로 나누어 기본적으로 8체제로 구분했다.
이 8체제 열매의 각각의 유형에서 나타나는 타입을 다시 세분해서 총 27종류로 지구상의 모든 열매를 분류했다.
이를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dehiscence(개과)

(1) follicle(골돌과)
①hakea type ②illicium type ③myristia type ④talauma type

(2) capsule(삭과)
①bombax type ②eriocoelum type ③forsythia type ④galanthus type
⑤hamamelis type ⑥lilium type ⑦nepenthes type

2. indehiscence(폐과)

(1) nutlet(소견과)
①nelumbo type ②rosa type

(2) drupe(핵과)
①laurus type ②prunus type ③rhapis type

(3) berry(장과)
①schisandra type ②nuphar type

(4)pyrenarium(경핵과)
①butia type ②ilex type ③latania type ④olea type

(5) amphisarca(호리병박과)
①adansonia type ②theobroma type

(6) nut(견과)
①centaurea type ②corylus type ③polygonum type

위 분류에서는 전통적인 열매 유형 분류에서 다루었던 시과, 수과, 영과, 협과, 삭과 같은 것들은 별도로 나누지 않았다.
그런 유형의 열매도 모두 위의 8체제 27종류에 포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전통적인 열매 유형 분류에서 사실상 중복되는 유형과 개념의 열매를 다르게 보고 구분한 예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 외에 육질과(肉質果, fleshy fruits, succulent)와 건과(乾果, 건조과, dry fruits)의 문제라든가,
여러 개의 열매가 달리는 복과(複果, 복합과, compound fruit)의 복잡한 양상과 용어상의 문제도 위 논문에서 말끔하게 해결했다.

다시 밤나무로 돌아오자.

앞서 말한 대로 밤나무의 열매는 견과(堅果, nut, glans)로 분류한다(여기서의 분류는 분류학적인 분류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견과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는 다양해서 ‘과피가 딱딱하며 흔히 자방실이 1개인 자방으로부터 발달하는 열매’라고도 하고
‘과피가 딱딱하고 1개의 씨가 들어 있는 열매’라고 하기도 한다.
견과를 전에 삭과로 잘못 분류했던 건 총포라는 조직이 갈라지는 것을 과피가 갈라지는 것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한 오류이다.
앞서 예로 든 견과의 정의에서 빠진 것은 ‘총포에 싸이는 열매’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비교적 최근의 자료일수록 ‘총포에 싸이는 열매’라는 내용을 포함해 견과를 정의하는 편이다.

엉겅퀴의 총포
신감채의 총포
산딸나무의 하얀 총포
밤나무가 속한 참나무과 식물의 열매는 대개 총포 또는 각두라고 불리는 조직에 싸인다.
그래서 견과를 각과(殼果) 또는, 각두과(殼斗科)라고도 한다.
도토리 같은 것의 밑부분을 감싸는 조직인 각두를 총포의 일종으로 보며 그래서 참나무과 식물의 열매를 견과의 정의에 합당한 열매로 본다.
국화과 식물이나 산형과 식물에서 주로 쓰는 총포라는 용어를 산딸나무, 개암나무속(Corylus), 참나무과(Fagaceae)에서도 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총포(involucre)라는 용어의 개념은 그 자체로도 모호하고, 포(bract)하고 관계된 정의에서도 약간 모호한 데가 있다.
어느 대학 교재에서는 ‘화서를 싸는 포들의 무리 또는 집단’을 총포의 정의로 삼았는데, 이 역시 다양한 형태의 총포를 아우르는 정의는 아니다.
화서라고 하면 여러 개의 꽃이 모여 달린 것을 가리키지만 개암나무속(Corylus), 참나무속(Quercus), 모밀잣밤나무속(Castanopsis)에서는
한 개의 꽃 또는 한 개의 열매만을 감싸는 조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 속의 식물에서는 다른 용어를 쓰든가, 그게 아니면 총포에 대한 개념을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가 쉽지 않지만 말이다.
개암나무 열매의 총포
졸참나무 열매의 총포
구실잣밤나무 열매의 총포
위 나무들의 열매의 총포(또는 각두)는 모두 하나의 열매만을 감싼다
어쨌든 밤나무속(Castanea)의 밤나무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견과의 정의에 부합하는 ‘총포’라는 용어를 쓰는 데 무리가 없다.
화서처럼 ‘여러 개의 꽃을 감싸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밤나무의 암꽃을 잘 들여다보면 3개의 꽃이 한데 모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이 3개의 꽃을 감싸는 조직, 즉 총포에서 가시가 점점 자라서 덮으면 밤송이가 된다.
그래서 하나의 밤송이 안에는 항상 3개씩의 밤이 들어 있다. 대개는 그것을 씨(종자)로 착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각각 열매이다.
셋 중에 혹시 수분이나 수정이 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쭉정이 상태로라도 남아 있으므로 정상적인 밤송이 안의 열매의 합은 늘 3이다.
밤송이가 벌어져 나온 알밤의 끄트머리를 잘 보면 어린 꽃이었을 때의 암술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라지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총포 조직이므로 견과를 개과가 아니라 폐과로 다루는 데 무리가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밤나무의 최초 암꽃 3개
어린 열매에 남은 암술대
각각의 열매 끝에 남은 암술대
충매와 풍매를 겸하는 밤나무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밤나무도 참죽나무처럼 이중자웅이숙(duodichogamy)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중자웅이숙이란 한 그루 안에서 수꽃과 암꽃이 시차를 두고 피는 자웅이숙(dichogamy)을 한 차례 더 하는 방식을 말한다.
수꽃과 암꽃이 시차를 두고 피는 이유는 자가수분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수꽃이 먼저 피고, 그 수꽃이 질 즈음에 암꽃이 피며, 암꽃이 질 즈음에 가지 맨 끝의 수꽃이 한 번 더 피는 것이 이중자웅이숙이다.
수꽃과 암꽃이 시간차를 두고 피어 자가수분을 피했으면 그걸로 꽃 피는 일을 끝마치면 되는데,
그 후에 구태여 수꽃을 한 차례 더 피우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동종의 타 개체(다른 밤나무)의 타가수분을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밤나무의 이중 자웅이숙
전에는 제아무리 큰 나무도 처음의 시작은 자그마한 씨였다고 썼다.
그러나 도토리나 밤 같은 것은 씨, 즉 종자가 아니라 열매이므로 최소한 참나무에서는 그렇게 쓸 수가 없다.
그렇게 식물이 가진 정답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참고자료

Bobrov, A. V. F. Ch. and M. S. Romanov. 2018. Morphogenesis of fruits and types of fruit of angiosperms. Botany Letters.

글쓴이
전문위원 이동혁
임업연구사 손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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