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언 땅의 흙과 함께 꽁꽁 묶여있는 생명의 봄, 그리고 봄의 새로운 희망을 끄집어냈다. 봄비가 잡아당긴 희망은 방울방울 이슬 맺힌 초록의 새싹이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뜨겁게 뿜어내는 우리의 열정이며, 겨울동안 깊은 잠에 빠진 온갖 동물의 몸짓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며 포근하게 감싸안는 햇살 머금은 자연이다.
봄에는 가볍게 걸으라 하였다.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무한한 자연의 생명력을 우리의 힘찬 발걸음으로 뭉개서는 아니될 터.잠시 숨을 죽이고 자연과 호흡하며 천천히, 그리고 가볍게 봄의 땅을 다독여보자. 초록 새싹이 발을 밀고 얼굴을 내밀 것이다.
4월, 저 밑바닥 골짜기의 얼음을 제외하고, 졸졸 소리내며 흐를 정도로 지켜보는 이 흐뭇하게 얼음이 녹았다. 수목원 전시림을 덮은 땅과 흙은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졌다. 그리고 겨울동안 그 땅 위를 가득 덮은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온 짙은 보라색의 새싹 하나. 복수초다. 복수초가 제일 먼저 수목원의 봄을 알렸다. 복수초 노란 꽃은 온종일 우아하고 고고하게 앉아서는 한 줄기 햇빛에도 반짝반짝 빛을 낸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한 ‘봄의 전령사’로의 뿌듯함 감출 길 없어, 포근한 바람 불어올 때마다 작은 꽃잎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양이다. 바람에 파르르 떠는 복수초 노란 꽃잎마저 반가운 마음을 어찌 감출 수가 있을까.
복수초에 질쏘냐. 수목원이 떠나가랴 울음 울던 주인공, 북방산 개구리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경칩이 지나고 수목원 곳곳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개구리는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알들을 쏟아낸다. 수목원의 고인 물 위에 둥실 떠서는 볼록볼록 조금씩 움직이는 개구리 알이 점점 올챙이로 변해가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만물이 기다리고 찬양하는 봄이 가진 책임은 새로이 태어난 생명들을 무사히 보듬어내는 일. 이제 막 제 모습을 보이는 봄은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듯 하다. 봄 햇살이 따사로워졌다.
양치식물원, 힘없이 푹 주저앉아있던 고사리가 벌떡 일어났다. 바위틈에서 얼굴을 내밀고, 나뭇잎 사이로 기지개를 편다. 가느다란 손 가득 피고 봄의 햇살을 맞는 고사리의 몸짓이 귀엽다. 가을 내내 화려한 붉은 단풍 만들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복자기의 단풍은 아름다운 추억만 만들어 주고는 담담하게 퇴장이다. 앙상한 가지의 복자기 옆으로 사시사철 녹색 푸른 잎 흔들거리는 일본섬향나무. 그리고 그 아래 작은 보석같은 큰구슬붕이가 일본섬향나무의 잎을 그늘 삼아 자라고 있었다. 이른 봄을 무사히 보내고, 작고 예쁜 보라색 꽃 활짝 피어내기를.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상사화는 4월에 잎이 먼저 나고, 6월에 잎이 다 지고 나면 7월에 살며시 꽃대를 올려 분홍색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꽃은 겨울에 다시 소리없이 시들어 잎이 나기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상사화는 그리도 조용하고 부끄러운 꽃이다. 검정색 상사화 표찰 밑으로 이번에도 조용하게 새싹이 솟았다. 엄지손가락 모양의 새싹은 옹기종기 모여 그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꽃이 나기 전까지 초록색 상사화 잎이 꽃의 외로움을 대신해 줄 것이다. 그리고 꽃이 없는 빈 자리를 봄의 햇살이 채워주겠지. 봄의 포근한 바람이 토닥여주고, 봄비가 가끔식 위로해주는 그런 멋진 봄을 보내다 여름에 나올 꽃의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른 봄 소식을 알리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든 만물들 사이로 고고한 자태의 앉은부채가 슬며시 솟아나왔다. 상춧잎 같은 초록색 얇은 잎을 돌돌 말고서는 주위의 소란스러운 몸짓, 움직임 하나 개의치 않고 미동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앉은부채. 그러다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되면 조금씩 잎을 편다. 앉은부채가 봄에 대처하는 자세는 이런 것일까. 봄이 되기도 전에 겨울의 얼음 틈새로도 고개를 빼꼼 내민다는 앉은부채가 올해에는 조금 늦은 모양이다. 아니면 아침 저녁으로 찾아오는 맷돼지의 습격에 기를 못펴고 나뭇잎 사이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달 남짓 찾아 헤맨 앉은부채의 등장이 고맙다. 봄의 새싹들이 전해주는 것은 봄소식만이 아니다. 고마움, 경이로움, 반가움. 겨울 동안 웅크리고 있던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어루만져 새로 깨어나게 도와준다. 모처럼 느껴보는 활기차고 싱그러운 기분, 생명의 봄이 함께 가져온 선물이다. 앉은부채의 꽃을 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 한다. 돌돌 말린 커다란 잎 안에 동그랗고 뾰족한 꽃의 형태를 이번 봄에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담긴 봄의 기운은 충분히 마음 가득 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보생명 사옥의 광화문 글판에는 겨울동안 이런 글이 있었다.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올리는 들꽃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곽효환의 ‘얼음새꽃’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얼음새꽃은 봄에 제일 먼저 모습을 보이는 노란 복수초다. 겨울의 서늘한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봄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복수초처럼 우리 모두 역경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따뜻한 봄의 시. 희망을 품고 나온 봄에는 희망만이 가득하다. 새로운 시작의 계절, 봄. 새싹이 솟아오르는 포근한 4월. 겨울의 시련을 이겨내 이른 봄 땅을 뚫고 솟아오른 파릇한 새싹들이 포근한 4월의 바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울 때까지 우리의 희망도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 4월의 시계 초짐이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