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가을을 회상한다. 가을에는 하늘이 높고 푸르며, 구름이 신선놀음 하듯 유유자적한다. 햇살은 딱 바람만큼, 바람이 부는 만큼만 따뜻하게 비춰오고, 가을의 바람 또한 햇볕이 내리쬐는 만큼만 불어온다. 햇살과 바람이 똑같이 숲에 들어 그 세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정도. 그 정도의 따스하고 선선한 날씨. 그게 바로 가을이다. 단풍이 갈색. 아니, 노란색. 그것도 아닌 붉은색.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빨갛기도 한 울긋불긋의 향연. 하나 둘 떨어지는 단풍잎이 머리칼을 스치면 그 아래 손에 잡힌 가지런한 책 한 권. 어쩌면 다정하게 맞잡은 다른 누군가의 손. 그렇게 딱 그만큼의 낭만. 그게 또한 가을이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 하늘이 풀이 죽기 전, 낙엽이 떨어지기 전, 마음이 쓸쓸해지기 전. 미처 다잡지도 못한 채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가을을 회상해 본다.
계수나무 향이 짙어 흔들리는 마음처럼 설레던 적이 있었다. 계수나무 향만큼 달콤하고, 노란색 하트모양 잎사귀만큼 콩닥콩닥 가슴 뛰던 어느 멋진 날, 그렇게 가을이 왔다. 코끝을 간질이는 솜사탕같은 향내는 계수나무의 그것이 아니라 가을의 냄새이리라. 가을이 오면 이렇게도 고운 냄새가 나는 구나, 조금은 억지스럽게 착각할 정도로 계수나무의 향은 가을이 옴과 동시에 풍겨왔다. 가을 내내 가을처럼 달콤하던 계수나무는 노랗게 변한 잎을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달콤하지도, 곱지도 않은 빈털터리 겨울나무. 가을이 아직 가지도 않았건만 손잡고 와서는 먼저 자리를 뜬 야속한 계수나무. 그는 완연한 가을의 나무였나 보다.
좁은잎단풍에 햇살이 깃든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꼭 좁은잎단풍이어야 했다. 당단풍 위로 쬐는 햇살과 은행나무를 비스듬히 비춰오는 햇살 또한 벌어진 잎 다물지 못할 정도로 멋졌지만, 햇살은 좁은잎단풍 아래여야 했다. 그가 사람들이 지나는 길가에 자리한 것은 가을의 불그스름한 햇살이 한껏 고인 자신의 모습을 알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람의 손에 의한 일이었을 지라도 그는 필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좁은잎단풍이 나는 가을은 순간이다. 그는 계수나무처럼 가을이 옴과 동시에 향기를 풍기지 않으며, 작고 귀여운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지도 않는다. 그저 가을이 흘러가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붉어졌다가 한순간 열정적으로 가을을 살고 뚝뚝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은 그의 낙엽이며, 단풍 위로 깃든 햇살이며, 온몸을 감쌌던 가을이다. 그러므로 묵직하게 뚝뚝. 그는 11월이 되기도 전에 모두 털어내 버렸다. 딱 한 가지. 근사하고 신비롭게 햇살을 머금고 힘껏 가을이던 좁은잎단풍을 회상하는 우리의 추억 조각 하나는 가지에 걸어놓은 채.
복자기가 일렬이다. 당장이라도 발맞추어 앞으로 걸어갈 듯 줄지어 선 복자기 행렬. 복자기 길에는 햇살도 쉬어가고 바람도 앉아보라며 벤치 또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나무 벤치에 가을이 앉았던 모양이다. 비스듬하게 복자기 단풍잎 사이를 파고드는 가을의 햇살이 벤치까지 닿았다. 그렇게 복자기 길의 낭만이 시작된다. 복자기 길에서는 터벅터벅 걸어도 여유로운 낭만이며, 어색하게 손을 잡아도 풋풋한 설렘이다. 책을 손에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해도 마음속에 잔잔한 미소가 인다. 붉은 것보다 더욱 붉게, 붉다 못해 도리어 빨갛게 물드는 복자기는 가장 진한 단풍의 정도만큼 진하게 가을을 선사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가을이길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찬찬히 쓰다듬어 준다. 박물관 앞 커다란 복자기 아래, 빨갛던 잎은 이미 다 떨어져 바짝 마른 낙엽만이 가득한 그 복자기 아래에는 아직 가을을 보낼 수 없는 우리의 아쉬운 마음만이 맴돌고 있는 듯하다.
11월은 가을이지만 가을이 아니고, 겨울이지만 겨울이 아니다. 단풍의 계절은 지나버렸고, 굳이 살피자면 낙엽의 계절이며 햇살보다 바람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는 바람의 계절이다. 그렇다고 가을이 지나간 것은 아니며 겨울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을이며 겨울이다. 그것이 바로 11월. 단풍의 아쉬움은 낙엽이 달래줄 것이다. 햇살이 녹여주던 마음은 바람이 단단하게 키워주겠지. 그렇게 11월에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바람에 시린 손을 감싸며 온기를 전하고 또 전해 "겨울아 어서 오라" 가뿐하게 마중 나갈 수 있도록 가을을 회상하자. 가을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서히 보내주는 것. 그 정도의 고요함과 깊이. 그것이 가을에 대한 명상이다. 또한 가을과 이별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