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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수목원소식지 Webzine

 탐방스토리
10 2014  탐방스토리
신현탁 / 산림자원보존과 임업연구사
허태임, 윤정원, 김상준, 안종빈 / 산림자원보존과 석사후연구원
  • DMZ 편지...시월에는
    • '시

      월'하고 부르면 내 입술에선 휘파람 소리가 난다
      유행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맨드라미들이
      떼를 지어 대문 밖에 몰려와 있다
      쓸쓸한 것과 쓰라린 것과 서러운 것과 슬픈 것의 구별이 안 된다
      그리운 것과 그립지 않은 것과 그리움을 떠난 것의 분간이 안 된다
      누구나를 붙들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이마에 단풍잎처럼 날아와 앉는다
      연록을 밟을 때 햇빛은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원작자를 모르는 시를 읽고 작곡가를 모르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처럼 단순하게 푸르렀다가 단순하게 붉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요한 생들은 다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다녀올 수 있으면 죽음이란 얼마나 향기로운 여행이냐
      삭제된 악보같이 낙엽이 진다
      이미 죽음을 알아버린 나뭇잎이 내 구두를 덮는다
      시월은 이별의 무늬를 받아 시 쓰기 좋은 시간이다

      이기철 시인의 시 「시월」을 읽으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맞습니다. 시인은 "나무처럼 단순하게 푸르렀다가 단순하게 붉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하지만, 이곳 DMZ자생식물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무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어렵게 시월을 맞이하는지 알지요. 빨갛게 물든 이파리 하나를 땅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무는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에너지를 집중한다지요. 그래야만 다가오는 혹한의 계절을 견딜 수 있으니까요.
      DMZ자생식물
      이곳에서 자주 보이는 군부대의 초소도 한껏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있으면 새하얀 억새도 머리에 꽂겠지요. 시월은 이렇게 약수터에도 구절초로 자분자분 내려앉아 있습니다. 시월에 띄우는 DMZ편지에서는 현재 조성 중인 DMZ자생식물원 안에서 만나는 희귀·특산 식물 2종과 습지식물 2종, 그리고 이 가을에 꼭 보여드리고 싶은 예쁜 식물 1종을 소개할까 합니다.
      DMZ자생식물원의 희귀·특산식물
      분홍장구채(Silene capitata Kom.) 석죽과, 위기종(EN)
      분홍장구채 볕이 잘 드는 절벽 바위틈에서 드물게 자라는 우리나라 희귀식물 분홍장구채입 니다. 여러 해살이식물로 한 뼘 남짓 자라 는데, 밑에서 여러 개의 줄기가 나오며 꼬부 라진 털이 식물체 전체에 있습니다. 마주 나는 잎은 난형으로 끝이 뾰족합니다. 지난 8월 철원의 어느 절벽에서 꽃이 한창인 분홍장구채를 만났었고, 9월 끝자락 DMZ자생식물원에 서는 이제 막 꽃잎 떨구려는 분홍장구채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 습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동안 삭과의 열매 도 곧 맺힐 것 같습니다. 연천, 철원 등 경기 북부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아주 드물게 자생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자생지 분포로 보면, 분홍장구채야 말로 DMZ와 함께하는 식물이 아닌가 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산 능선에서 고요히 지켜보았을 것이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살풍경을 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꽃을 피웠겠지요. DMZ자생식물원에서는 DMZ일대에서 자라는 식물 중 희귀·특산식물, 북방계식물을 포함하여 현지내·외 보전이 필요한 식물 39종을 목록화하여 'DMZ중점관리종'으로 선정하였고, 이들 종에 대한 자생지 탐색 및 보전방안을 마련하려 합니다. 연구 여건이 갖추어 진다면, 북한 지역에 자생하는 식물까지 확대 선정하여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늘 이 귀한 분홍장구채의 존재를 알려드리는 일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봐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
      백부자 (Aconitum coreanum (H.Lév.) Rapaics) 미나리아재비과, 멸종위기종(CR)
      백부자 자생지보다도 한약방에서 오히려 유명한 식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너도 나도 찾아 다닌 탓에 개체 수는 줄었고, 심각한 멸종 위기에 놓인 백부자입니다. 산지의 능선이 나 가장자리 비교적 햇볕 잘 드는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식물입니다. 옛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는 덩이뿌리에서 나온 줄기는 높이 1m까지도 자랍니다. 어긋나기로 달린 잎은 3개로 깊게 갈라지고 갈래조각은 다시 2~3회 갈라집니다. 9월 중순께 줄기 끝에 투구모양으로 달린 연한 황백색의 꽃을 관찰할 수 있었고,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 또한 오래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 니다. 날것으로 먹으면 독이지만, 달 여서 처방하는 한방에서는 만병통치약급 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현재 자생지 훼손 및 개체 수 손실이 생각보다 심각한 실정입니다. 식물이 사람의 병을 고치고 살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백부자와 같은 식물이 멸종된다면 식물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도 위기를 맞이하지 않을까 자못 염려스럽습니다.
      DMZ자생식물원의 습지식물
      물매화 (Parnassia palustris L.) 범의귀과
      물매화 우리 선조들은 고매한 자태 앞에 수식어 마냥 '매화'를 애용했다 하지요. 우리나라 습지에는 물매화가 있습니다. 꽃 생김새가 이른 봄 말갛게 피어난 매화 같습니다. 잔 뿌리가 사방으로 뻗는 여러해살이식물로 한뼘 남짓 한 것에서부터 크게는 50cm 가 까이 자랍 니다. 꽃대 중간 쯤 잎자루 없는 1개의 잎이 바투 달리고, 끝에는 한 송이 꽃을 달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단아합니다. 물 매화의 특성상 꽃에 광택이 있어서 어찌나 부시 던지, 9월 중순께 핀 꽃을 사진에 담다 가 그 화사한 빛 덕에 애를 먹었습니다. 수술 의 갯 수가 3~8개로 훨씬 적고, 한라산 중턱 이상에 사는 종을 애기물매화(P. alpicola)로 구분 짓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이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DMZ자생식물원 내 습지원이 조성되면, 가을에는 그 곳 물매화 곁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낙지다리 (Penthorum chinense Pursh) 돌나물과, 약관심종
      낙지다리 가을 강변에 갈대가 있다면, 가을 습지에 는 붉게 물드는 낙지다리를 손꼽고 싶습 니다. 여러해살이 습지식물로, 높이 30-70 cm 정도 곧추서며 자랍니다. 뿌리는 길게 뻗고, 홍자색 줄기는 털이 없으며 상부에서 가지를 칩니다. 어긋나는 잎은 엽병이 없고 가장 자리에 잔톱니가 있으며 다소 막질 입니다. 7월경에 원줄기 끝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달 리는 황백색의 꽃은 위쪽으로 치우쳐서 달리는 덕에 두말없이 낙지다리 처럼 보입 니다. 9월 말께 DMZ자생식물 원에서 여물고 있는 낙지다리 열매는 붉은 빛으로 단풍이 한창입니다. 머지않아 심피가붙어 있는 부분 위쪽이 벌어지면서 자잘한 종자를 한껏 떨굴 것 같습니다. DMZ자생식물원 내에 조성 될 습지원에 모여 자랄 낙지다리의 가을 군무를 떠올리니 우리 DMZ식구들 마음도 발그레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을에 꼭 보여드리고 싶은 DMZ자생식물원의 식물
      솔체꽃 (Scabiosa tschiliensis Gruning) 산토끼꽃과
      솔체꽃 구절초가 가을의 문을 열었다면, 솔체꽃 보랏빛이 번지며 가을은 한껏 무르익는 것만 같습니다. 중부 이북의 다소 고산에서 자라 는 두해살이식물로, 한 뼘 크기에서부터 크 게는 어른 무릎까지도 자랍니다. 뿌리에서 올라온 잎은 꽃이 필 무렵 없어지고, 줄기에 달린 잎은 위로 올라 갈수록 점점 깊게 갈라집니다. 여리게만 보이는 꽃대는 버티기 힘들 것만 같은 크기의 둥근꽃을 달고 있습 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앙부의 작은 꽃은 네 갈래로 갈라지고 주변부의 큰 꽃은 다섯 갈래로 갈라지며, 꽃잎 위로 불쑥불쑥 나와 있는 가느다란 수술 끝에는 앙증맞은 연분홍색 꽃밥이 맺혀 있습니다. 꽃잎 다 떨구고 열매 맺을 무렵엔 영락없는 산토끼꽃 같습니다. 근연 분류군으로 체꽃, 민둥체꽃, 구름체꽃을 명명하기도 하였으나, 이 종들에 대한 분류학적 혼돈은 여전한 듯합니다. 꽃의 자태에 버금가게 예쁜 이름 '솔체꽃'에 대한 어원은 여러 설이 있지만 썩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라는 꽃말을 지녔고 한방에서는 열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꽃이 하도 고와서 관상용으로도 제격이겠으나, 두해살이 식물인 탓에 해마다 꽃을 보려면 종자를 고이 받아다가 다시 뿌려주어야 하는 관리가 뒤따릅니다. 전체적으로 짙고 옅은 보랏빛이 조화로이 어우러진 이 어여쁜 꽃은 만날 때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송이 데려다가 당신께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MZ자생식물원 전시원모습
      현재 조성 중인 DMZ자생식물원 전시원 모습입니다. 해발 630고지인 우리 원에서는 아침마다 안개 속에 잠기는 편치볼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기온이 꽤 쌀쌀해졌습니다. 우리 DMZ자생식물원 식구들은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습니다.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여기는 단풍 좀 봐야지 하면 어느새 서리가 내려 잎들을 다 떨궈버리지."
      이렇듯 이곳의 시월은 짧고도 짧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푸르른 날」이라는 시에서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드는데/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라고 노래하면서 그리운 사람을 불렀지요. 가을이 아무리 짧고 싸늘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더라도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이곳 식물들과 함께 이 계절을 통과할 거라는 약속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