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단풍의 정취가 가득한 10월, 국립수목원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광릉숲의 역사적 가치와 근대 변천사 재조명을 통해 국립수목원의 좌표와 미래를 전망하는 '터 100'년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광릉숲은 1468년 죽엽산을 중심으로 반경 십오리의 산림이 조선조 7대 세조대왕릉인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되면서, 능원(陵員)과 산직(山直)이라는 관리를 두어 보호 관리됨에 따라 오늘날 훌륭한 광릉숲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광릉숲은 1912년에 그 일부를 시험묘포로 정하면서 조림, 양묘 등 임업 연구의 출발지가 되었다. 일본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기에도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되어 왔으며, 1987년 광릉수목원을 거쳐 1999년 5월 24일 국립수목원으로 개원하였다. 올해는 이 곳 광릉숲에서 임업연구를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광릉숲은 국내에서는 4번째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 등재되어 2010년 6월 세계적인 숲으로 인정받았다.
광릉숲은 광릉골무꽃, 광릉요강꽃, 광릉물푸레 등 17종의 광릉특산식물 등 자생식물과 크낙새, 까막딱따구리, 장수하늘소 등 18종의 천연기념물을 포함하여 총 5,993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생물자원의 보고이다.
'터 100'년 심포지엄은 1부, 2부, 3부와 종합토론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생물다양성을 주제로 광릉숲의 생물상과 장기생태모니터링을 통한 보전관리 방안에 대하여 전문가 발표로 진행되었으며, 2부에서는 540년간 보존된 광릉숲에 대한 역사와 가치를 평가하고 재조명하였다. 3부에서는 광릉숲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지역사회 발전과 성공모델 방향을논의하였다. 마지막 종합토론 시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광릉숲의 보전과 이용에 대한 토론을 통해 앞으로의 국립수목원 역할에 대해 논의하였다.


광릉숲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구전, 비사 등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광릉지, 봉선사지, 광릉고사, 광릉고사비요, 광릉능규, 동여도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일부를 정리하여 보면 세조 1년 9월 29일(1455년) 포천 주엽산, 무등산에서 사냥을 구경하다.
세조 5년 10월 11일(1459년) 풍양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저녁에 이궁(離宮)에 머무르다. 세조 14년(1468) 11월 28일 임금을 광릉의 예장(禮葬)하고,
예종 즉위(1468년9월7일)년 9월 25일(1468년) 2품 이상과 함께 상왕의 묘호, 시호, 능호, 혼전을 정하고 능호를 광릉이라 하면서 시작이 됨과 함께 철저한 보호 관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설이 제기되는 부분중에 하나가 능지를 누가 택지 했느냐에 대한 부분이 두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부분을 광릉지에서는 이와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께서 동쪽으로 순행하고 금강산, 오대산에서 환가할 때 포천에 머물렀는데, 도보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서 길가에 멈추어 서서 주엽산(注葉山)의 기세를 바라본 다음 이어서 주엽산으로 들어가 높은 언덕에서 잠시 휴식하며 "이곳을 수장(壽藏)으로 정하고", 길이 동쪽 동구 밖을 거치게 되자 진벌점에 이르러 8일 동안 사냥 구경을 하였으며, 풍양궁(이궁)에 들렀다가 환궁하였는데, 화소를 넓게 정하고 수목을 많이 심으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대대의 도민들로 하여금 나의 은택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는 광릉고사(光陵故事)에서 나왔다....
반면 봉선사기에 '군신이 택지하였다" 는 설은 이와 어긋나니 무슨 증거로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다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골 백성들 사이에 전설과 초동협녀들은 모두 미리 정해두었던 땅이라 여기니 아무런 증거가 없이 나온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광릉지에 기록)
따라서 위에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광릉의 시작은 사냥터에서 인연이 되었으며, 능지로의 선정은 세조가 자신의 수장을 미리 선정한 것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