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라 고산(수직분포 100~1,400m)에서 자라는 상록교목으로 높이 32m, 지름 1.5m까지 자라며 나뭇가지가 1년에 한매듭씩 자라 전이 쳐진다하여 전나무로, 겨울눈이나 열매 등에 젖과 비슷한 백색물질(수지)가 나온다하여 젓나무 등으로 불리워졌으나 한국식물분류학회와 문교부 맞춤법 등에 의해 "전나무"로 통일하여 사용되고 있다. 분비나 구상 등과 다른 점은 잎 끝이 갈라지지 않고 열매가 대형이고 수피가 황갈색으로 잘게 떨어지는 것이 다르다(일본젓나무는 잎 끝이 뽀쪽하나 양끝이 갈라졌고 껍질이 청회록색으로 미끈한 점이 다름).
광릉 숲 전나무가 유명한 이유는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과 정희왕후가 묻힌 숲으로 세조생전에 능림으로 설정하고 이곳을 보호하기 시작하였으며, 세조가 죽기 전 당부하기를 "이곳에 나무를 많이 심고 잘 보호(존)하면 이 마을에 주변에 많은 은덕이 있을 것이다"라는 유지(광릉지보)를 생전에 남김으로 세조사후 능참봉(산직)들에 의해 진달래와 회백(전나무)을 동서 시오리(6㎞)에 걸쳐 길가에 심고(광릉지보 예조하첩 241쪽) 가꾸기 시작하였던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이것이 광릉 숲에 나무를 심고 보호하는 효시가 된 것이다. 또한 여기 옮겨 심은 전나무들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옮겨왔다고 봉선사 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다.(현재 기록확인중)
이런 연고로 잘 보존된 광릉 숲에는 다른 숲과 달리 복자기, 당단풍, 서어나무, 까치박달을 비롯하여 잣나무, 갈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등이 어우러져 임업에서 말하는 클라이맥스(forest climax)가 존재하는 숲으로 세계문화유산(광릉)과 생물권보존지역이 함께 공존하는 보기드믄 숲의 하나이다.
이런 광릉 숲에 본격적으로 나무를 식재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국유림구분조사에 의해 1913년 국유묘포가 설치되어 명실공이 국유양묘장으로 묘목을 생산하기 시작한 1920년대 초반부터이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대동아전쟁)을 치루기 위해 물자공출(기름, 목재 등)에 의한 노동과 전쟁물자 착취로 아름드리나무를 벌채하고 소나무류(잣나무 포함) 마다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껍질에 상처(?)를 계급장모양으로 남겨두어 광릉을 비롯한 전 국토의 많은 나무는 착취와 도벌과 기타 등의 사유로 벌채되고 헐벗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1923~1945년 국권회복전까지 조림사업을 본격적으로 벌
여 낙엽송, 잣나무, 전나무, 상수리, 굴참나무, 느티나무, 갈참나무, 종비나무, 독일가문비 등을 적지시험 삼아 광릉 숲 곳곳에 식재하게 되었다. 이 조림사업은 1945년 국권회복 후에도 계속 이어 오다가 1950~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잠시 멈췄다가 제1차 치산녹화계획이 수립(1963~8)되고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다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녹화사업의 시초는 산림청(1967.1)이 발족되고 나라의 수장(박정희대통령)이 최초로 외부에 기념조림을 한 지역인 현 국립수목원 육림호수 주변의 침엽수원을 둘러싸고 있는 1.5㏊면적에 걸쳐 남겨져 있다. 1986년에는 이 숲에서 1988하계올림픽 메인스타디움(현 올림픽공원) 공원조경에 쓰일 나무를 솎아 이식하여 Korean Fine(잣나무)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식재된 나무가 바로 전나무와 잣나무이다.
현재 이런 인공림이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는 곳은 육림호수 위 전나무 숲이다. 이 곳은 1923~1947년에 걸쳐 식재한 지역으로 우리나라 전나무 인공림으로는 유일하게 성공하여 온전히 보호되어온 숲이며, 나무 높이만 해도 30여 미터에 이르고 나무 한그루 당 재적이 약 0.7~1.2㎥에 이르는 대경목이다. 광릉 숲에 이러한 대경목이 울창한 전나무숲은 산림교육원(폭포수 주변) 2㏊를 비롯하여 국립수목원 외국수목원, 약용식물보존원 주변 등 곳곳에 많은 면적은 아니지만 모자이크 형식으로 분포하고 있어 적지를 찾아 식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광릉 숲의 별미는 관통하는 도로(98번)변의 침엽수인 전나무, 잣나무와 당단풍나무, 복자기, 까치박달 등이 어우러져 온갖 형형색색으로 새순이 돋는 봄과 나무마다 단풍이 어우러지는 가을이 아닌가 한다. 광릉숲의 가을단풍은 10월 24일을 전후 5일이 가장 좋아 국내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믄 풍광을 자랑한다. 그것이 바로 단풍나무류와 전나무, 잣나무가 어우러진 단풍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릉 숲은 1980년 초반까지만 해도 한 낯에 햇빛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던 것이 1980년대 말 관통도로 포장에 의해 점점 고사되어 많은 양의 노거수가 사라지고 현재는 그루터기만 남아 예전에 나무가 많았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나무가 많은 도로를 포장 할 때에는 사전에 횡단배수로, 수목보호대 등의 충분한 계획과 사전조치를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현재 있는 도로위에 모양대로 아스콘포장을 포장하여 물길을 막는 등 수목생육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행태의 작업을 시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침수, 복토 등 온갖 재해(?)로 인해 뿌리고사, 아스콘에 의한 수분차단, 줄기고사 등으로 2012년 현재 전체 본수의 3/5정도가 고사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나무도 70%이상이 10여년을 못 견디고 고사할 것으로 추정되어 여기에 몸담고 있는 죄인(?)의 마음으로 지켜주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래 몇 년 사이에는 기후변화에 따르는 태풍(매미, 곤파스 등) 등, 특히 곤파스 때에는 6천여본의 수목이 넘어지거나 부러져 광릉 숲이 형성된 이래 역대 최대의 나무가 사라지는 고통을 겪었다. 현재 남겨진 나무마저도 집중호우와 강풍 등 각종 기상이변으로 인해 한그루 두그루씩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이 더더욱 메인가슴을 저리
게 한다.
앞에 언급한 도로포장의 인재(?)는 포장 전 충분한 조사와 폭넓고 세밀한 검토(수목보호 조치와 더불어 횡단배수 처리 등)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많은 수의 나무들이 고사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어 매일같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왜 그 같은 조언을 하지 못했나 하는 죄책감마저 든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에 남아 있는 전나무 등 대경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현재 포장된 아스콘을 들어내어 다시 황토길로 환원시키고 산림쪽에서 하천방향으로 횡단 배수로를 설치하며 자연수로와 계곡 방향에서 물길을 살펴 얕으막한 생태형 연못을 조성하여 원래 이곳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다. 나아가 매년 번식과 월동을 위해 도로를 횡단하는 중에 차량에 의해 수백마리씩 죽어(road kill)가고 있는 북방산개구리 무리의 안전한 이동 방법도 겸하는 등 이제 몇 남지 않은 광릉숲의 지킴이 전나무 대경목의 후계수를 증식하여 숲을 재조성하고 그 명맥을 잇게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닌가 한다. 2005년까지 이러한 사업을 국립수목원과 산림생산기술연구소에서 각기 진행되어 왔으나 지금은 양기관 어디에서도 이 사업의 시작은 찾아볼 수 없다. 조속한 시일안에 양기관의 협의하에 종자채취와 더불어 양묘, 식재사업이 다시 추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광릉숲에서 전나무 자연 분포식생을 보려면 광릉문화재관리소 주차장에서 능으로 오르는 길 좌우측(우측에 대경목 분포)에서 볼 수 있다. 봉선사 약수터(광릉문화재소관리소 주차장건너 편)주변과 평화원 농경지 시작점의 광릉시험림과 경계점(향명 윤노리골 입구)은 대경목이 분포하고 있으며, 또한 광릉에서 가장 큰 전나무가 분포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