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 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정희성 시인의 시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중에 체로키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크리크족은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위네바고족은 '작은 곰의 달'이라고 불렀다지요. 이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지난봄부터 11월을 맞기까지 우리 DMZ자생식물원 식구들은 식물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군사 활동만큼이나 엄격했고, 날마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마음을 조려야 했습니다.
이제 11월, 이곳의 거의 모든 식물들이 다른 곳보다 빠르게 씨앗을 맺고 월동 준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치열하게 자기 삶의 영역을 넓히려고 애쓰던 식물 이야기 대신에 DMZ자생식물원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DMZ자생식물원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휴전선에 맞닿아 있는 지역이지요. 사전적 의미의 DMZ(Demilitarized zone)는 '군사시설이나 인원을 배치해 놓지 않은 지대'라는 뜻이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반도 DMZ은 철저히 무장된 지역입니다. 군사적 긴장감이 어느 곳보다 높은 곳이지요. 이러한 DMZ이 탄생시킨 새로운 공간으로 '접경지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접경지역은 '접경지역 지원 특별법'에 근거하여 설정되어 있으며, 모두 DMZ와 인접하거나 DMZ안에 있는 지역들입니다. 우리 식물원이 자리한 양구군 해안면은 접경지역인 동시에 곳곳이 민간인통제지역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이름 붙여 고유명사화 된 '펀치볼'로 유명한 양구군 해안면입니다. 사진에서와 같이 남방한계선에 맞닿아 있는 을지전망대에 오르면 해안분지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운석이 떨어져 분지가 만들어졌다는 설과 차별침식 때문에 지금 모습을 보이게 됐다는 설이 있으며, 23㎢ 넓이의 분지 전체가 해안면입니다. 다소 생소했던 '해안'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바다냄새가 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한자로는 '亥安'이라고 씁니다. 예로부터 습한 지대였던 탓에 뱀이 많았고, 뱀과 상극인 돼지를 앞세워 어느 스님이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돼지 덕분에 편안해졌다는 해안. 몇 번이고 되뇌어 보아도 '펀치볼'보다는 지형 그대로 우리 이름 '해안분지'가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DMZ자생식물원 조성공사는 2009년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총 18ha면적으로 현재 국제연구센터와 게스트하우스 2개 동이 완공되었고, 7개 전시원(DMZ원, 고산식물원, 희귀특산식물원, War가든, 고층습지원, 저층습지원, 북방계식물원)을 조성 중입니다. 우리 식물원에서는 DMZ 및 인근지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진 자생식물 2,328분류군 중 분류학적으로 혼돈이 있는 종·재배종·귀화식물·DMZ식물원에서 생육 불가한 종 등을 제외한 2,071분류군을 대상으로 수집·증식하여 전시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2013년부터 DMZ 일대 식물 탐색·수집에 대한 자체 및 위탁 연구과제가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알음알음 모아진 식물들은 종별 특색에 맞게 배치됩니다. 우리 식물원은 전시뿐만 아니라 증식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DMZ 일대 자생식물들의 보전에 큰 보탬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DMZ원으로 이어지는 주동선 공사 전(2014.06.09.)과 후(2014.10.22.) 풍경입니다. 여전히 공사 중일지라도 곳곳에 내려앉은 가을이 아늑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DMZ원과 고산식물원으로 이어지는 전시원 부지 정돈 중(2014.06.25.)인 풍경과 정돈 후(2014.10.27.) 모습입니다.
전시원 내에서 국제연구센터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소 척박했던 지난봄(2014.04.11.)과 달리, 지난 계절 동안 바삐 움직인 덕분에 가을에는 식물들이 하나 둘 원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2014.10.27.).
여전히 공사 중이기는 하나, 우리의 노력들이 촘촘히 새겨져 DMZ자생식물원이 제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이곳 오지에서는 험한 길 달리는 전기차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녹음 짙던 여름을 통과하고(2014.06.25.), 가을걷이 하듯 정돈되어 가고 있는 DMZ자생식물원 전시원 풍경 입니다(2014.10.28.). 주동선 포장공사가 끝나니 제법 전시원 모양을 갖추는 것 같습니다. 멀리 보이는 만대 저수지 앞까지가 전시원 부지이며, 아직은 조성 전이지만 저수지 덕분에 운치가 그만입니다.
공사 중인 전시원 내를 걸어봅니다. 도솔산, 대암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작업현장은 여느 도시의 살벌한 공사장 풍경이 아닌 자연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공사장에도 가을이 내려앉아 우리의 노고를 응원하는 것만 같습니다. 멀어져 가는 가을이 아쉽기만 합니다. 공사 중인 전시원 내를 조금 더 걸어봅니다. 원내에서는 고라니 발자국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DMZ자생식물원에 출현하는 포유류로는 고라니가 단연 대장인 것만 같습니다. 개체수로 본다면야 기껏 7명이 거주하는 우리 식물원 식구들은 명함도 못 내밀지요. 전시원이 개장된다면 고라니와의 전쟁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찾아오는 고라니가 반갑기만 합니다. 이 마을에 종종 내려온다는 멸종위기종 산양을 머지않아 만날 수도 있을 것만 같고요. 원래 이곳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이런 동식물들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라니 발자국을 유심히 내려다 볼 때가 많습니다.
DMZ자생식물원 식구들은 지난 3월부터 처음 상주해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곳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국이었습니다. 5월까지도 눈이 내렸지요. 교통도 불편하고 민가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이 마치 세상의 맨 끝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11월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덕분에 이제 식물원은 차츰 그럴 듯한 외모를 갖춰가고 있으며, 2015년 가을께 개원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마음 모아 열심히 개원 준비를 하는 우리 일원들은 이제 주변 풍경들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고향을 다녀오거나 출장을 갔을 때 DMZ자생식물원의 아늑함이 그리워지기도 하거든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당장이라도 첫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지만 우리 식물원 식구들은 차분하게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